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화성시청·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화성 향남읍 요리 일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화성 향남읍 요리 일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도로 공사장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관

3년 전 경기도 화성 향남2지구 동서간선도로 고분 발굴 현장에서 뜻밖에도 삼국시대 금빛 찬란한 금동관(金銅冠)이 발견됐다. 고고학계는 눈이 번쩍 띄었다. 왜 화성에서 금동관이 찾아진 것일까, 또 화성은 고대사에서 어떤 곳이며 또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

전문가들을 흥분시킨 것은 금동관의 화려한 모양이었다. 찾아진 관모 외면에는 삼엽초화문(三葉草花文)이 투조돼 있었고 공주, 나주에서 이미 발견된 금동관들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 금관을 착용했던 지배층은 왕이었을까, 아니면 왕족이었을까.

공주, 나주 등지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같은 모양으로 미뤄볼 때 화성 금동관 주인공은 백제시대 사람이다. 학자들은 백제의 금동관 출현을 한성 후기인 4세기 말~5세기경으로 상정해 왔다. 한성기의 금동관모는 반원형 고깔 모양의 상투를 덮는 절풍형이다. 상부에는 긴 대롱에 반구형 장식이 달려있으며, 좌우 측면에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한 장식을 갖추고 있다. 화성 금동관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화성 고분에서는 또 금동식리(金銅飾履, 신발), 금제이식(金製耳飾, 귀고리), 환두대도(環頭大刀, 둥근 고리 자루칼) 등 화려한 장신구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는 왕들이 치장하는 각종 금제 장신구들이다. 왕도가 아닌 지방에 이처럼 화려한 금장신구를 갖춘 지배층이 있었다는 것은 백제국의 위상을 재평가해야 하는 증거물들이다.

화성은 본래 마한의 영토였다. 그러다 북방에서 내려온 온조의 백제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흡수되어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이 같은 금동제 일괄 유물은 백제 초기 마한과 백제의 통합, 지방관제 확립이 이루어진 백제의 역사를 입증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시기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로 추정된다.

화성은 뱃길로 대륙을 통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왕도 위례성 시기 백제는 서해 당성(唐城)을 통해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또 일본과도 교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성은 지금도 이런 역사적 바탕 아래 미래의 번영을 꿈꾸는 번영의 요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화성 향남읍 요리 일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제 이식(귀고리)
화성 향남읍 요리 일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제 이식(귀고리)

2㎞ 길성리 토성, ‘담로’ 치소인가

금동관이 출토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성리(吉城里)에 장대한 토성의 유구가 있다. 왜 ‘길성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길성은 우리말로 ‘길재’이며 좋은 땅 혹은 ‘길다(長)’는 뜻도 된다. 이 토성은 성벽 둘레가 2311m에 달하는 큰 규모의 유적이다. 한반도 고대 왕도에 있는 토성 규모와 맞먹는다. 신라 왕도 경주 반월성이 1.8㎞인 것을 감안하면 그 보다 더 큰 셈이다.

이 토성은 언제 축조되었으며 누가 사용했던 것일까. 1980년대 한신대박물관에서 길성리 토성 유구를 조사한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공장 건설 및 과수원 도로 개설 과정에서 완전히 절단된 성곽 내부와 성안쪽 등지에서 막대한 양의 토기가 출토됐다.

토기는 기원전후 무렵부터 쓰인 경질무문토기였다.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제작돼 유통됐던 토기다. 성곽 내부에서 경질무문토기가 출토된 한성도읍기 백제 성곽으로는 풍납토성과 이천 효양산성, 파주 고모리토성 등지가 지금까지 보고된 바 있다. 이로써 이 길성리 토성의 구축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글마루 취재팀은 지난 7월 초(2017년) 이 토성을 답사했다. 토성으로 진입하는 차량도로에서부터 백제 토기가 산란했고, 그 이전 마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붉은 색의 와질 토기도 발견했다. 토루를 이용해 가족묘를 쓴 둑 모양의 긴 유구는 백제 이른 시기에 축조됐을 것으로 보인다. 잡석이나 할석을 넣지 않고 흙만 다져 쌓은 것이었다. 이 지점으로부터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의 토루도 정연히 남아 있었다. 토루 밖은 고준(高峻)하여 적들이 침입하는 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 지점에서는 할석을 흙에 박은 판축 흔적이 나타났다. 수습된 토기편을 보면 본래 마한인들이 살았을 구릉에 백제의 새로운 세력이 확대된 토성을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성리 토성 주위로 광범위한 마을이 조성됐고 황구지천(黃口池川)을 중심으로 한 경작지는 이들에게 풍부한 경제력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금관이 출토된 향남리는 길성리 토성에서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금동관의 주인공은 길성리 토성을 다스렸던 백제 최고의 행정관 담로(擔魯)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길성리를 비롯한 일대는 많은 공장이 들어 서 있어 유적의 완전 보존이 어려운 실정이다. 확대된 학술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길성리 토성 토루
길성리 토성 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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