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전 동의대 외래교수

ⓒ천지일보 2019.9.16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할 수 있다’는 사고는 봉건적 전통사회에서의 공동체주의 가치관에서 유래한다. 특히 유교적 전통 윤리가 강하게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 의식이 더욱 강하다. 집단 전체의 가치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의명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 침해나 불이익은 불가피하게 감수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대의명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수의 이익이 개인 또는 소수의 이익에 우선한다는 논리는 근대 공리주의적 세계관에서도 볼 수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표방하며 등장했던 공리주의적 세계관 역시 ‘다수의 행복’이라는 결과에 기준을 두고 개인의 권리에 앞서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다.

두 입장은 모두 동기나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결과주의적 윤리관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대의(大義)’를 위해 ‘소의(小義)’를 희생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작은 부조리’는 회피하거나 무시해도 괜찮은 것일까. 또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악한 수단’을 사용해도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결과’만 좋다면 ‘과정’이 나빠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이번에 정치권을 넘어 국민적 이슈가 된 ‘조국 장관 임명 논란’은 바로 이러한 철학적 근본 물음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검찰개혁, 사법개혁이라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비도덕성이라는 ‘작은 부조리’는 허용할 수 있는 문제인지, 검찰개혁 완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격 사유가 있는 후보자를 임명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사법개혁만 이루어진다면 그 과정이 다소 문제가 있어도 괜찮은 것인지 말이다.

조국 장관이 비록 도덕성 논란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이기는 하나 사법개혁의 적임자이기에 고심 끝에 그를 장관에 임명한 대통령의 결정은 바로 위의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겠다.

우리 사회의 개혁과 민주주의라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흠결이라는 ‘작은 것’은 용인될 수 있다는 이러한 논리는 공적 사회에서 공공성의 주요논리인 비용 편익의 방식으로도 적용되어 왔으며 진보개혁 진영에서도 묵시적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A를 위해서 B를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효용을 다했고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는 더 이상 우리 사회를 혁신시키지 못한다는 반론 또한 만만찮은 편이다. 조 장관의 임명을 반대하고 그에 반발하는 사태 또한 이 지점에서 분노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봐야 하겠다.

따라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하더라도 그로 인해 제기되는 잘못에 대한 지적은 진영논리로 반박하거나 자기합리화로 방어할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수용하고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특히 논란이 되는 ‘자녀 입시 문제’의 경우는 구조적 접근을 통해 제도적 개선책을 반드시 강구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경쟁적 성과주의는 지난 시대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사회 풍조였다. 하지만 사람이 먼저임을 추구하는 사회는 과정의 공정함이 결과의 정당성을 보증해야 한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합리화할 것이 아니라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이 결과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로운 선택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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