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시민주권 홍보기획위원장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지난 14일 옛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보수정당의 대표인 그가 ‘친북좌익 학생운동가’ 출신인 고 ‘박종철 열사’의 24주기를 맞아 박 열사의 고문치사 현장이자 현재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탈바꿈돼 있는 박종철 기념관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언론은 그가 한나라당 대표로서 처음으로 그곳을 찾은 것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 담당 검사로서 최근 잇단 설화와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 낙마사태에 따른 당청 갈등, 야당의 무차별 공세 등으로 혹독한 시련에 직면한 상황에서 초심을 되새기려는 행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는 현장에 동행한 기자들에게 “황적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의사에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하라’는 압력이 있었으나, 나는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라고 상부에 보고했다”고 자신의 공적을 자랑했다. 병역불이행과 보온병 포탄, 자연산 발언 등으로 구설수에 시달리다 감사원장 임명문제로 청와대와 각을 세우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그가 갑작스레 남영동을 찾은 이유는 언론의 친절한 해석대로 국면전환용 행보임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궁해도 그렇지 박종철기념관을 위기타개용 무대로 활용한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먼저 그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 검사’라는 타이틀은 일부는 진실일지 몰라도 총론에서는 크게 과장된 부분이 많다. 이미 서울대 조국 교수가 트위터에서 일부 진실을 거론했지만 당시 일선 취재기자였던 나는 실체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당시 사건 발생 현장의 관할인 서울 용산경찰서를 출입하는 사건기자였다. 당시 취재노트와 주변인물의 진술을 종합하면 안 대표는 초기에 상부지시에 따라 수사를 하다 후기에는 고문치사 진상의 은폐를 방조한 당사자다.

특히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으로 사건을 지휘한 최환 변호사의 진술을 들어보자. 최 변호사는 “공교롭게 사건 당일 형사부의 안 검사가 당직검사인데다 그가 용산경찰서 담당 검사여서 그에게 사건이 배당됐던 것”이라며 “박군 부모와의 합의를 내세우며 부검도 안한 채 당일 화장을 요구하는 경찰과 안기부 등의 요구를 거절하고 법적 절차에 따라 부검토록 한 것은 바로 나였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자칫 은폐조작 될 뻔했던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것은 경찰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강행한 점과 부검의의 부검소견서를 현장에서 받아둔 점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안상수 검사는 강단 있는 최환부장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을 뿐 이후에는 사실상 직무유기성 부실 수사를 했다. 그는 한 달여 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된 경찰관 2명으로부터 고문경관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받고도 이를 눈감아달라는 안기부 등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

이 사실은 4개월 후 결국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실체를 폭로하는 바람에 그의 ‘부실수사’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후 검찰을 떠난 안 대표는 1995년 3월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란 책을 내 자신의 활약을 떠벌렸다. 이 바람을 타고 그는 다음해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국회에 등원하고 이어 내리 4선에 성공했다.

또한 자신의 업적을 과장한 것 이외에도 박종철 열사를 거론하며 민주주의를 운운한 점도 유감이다. 그는 당 대표 취임 후 청와대의 충실한 여의도 심부름꾼을 자임하며 다수의 힘으로 국회를 운영했다. 지난해 말의 예산안 날치기도 그 한 예이다.

그가 방명록에 ‘민주화를 가져오고 본인을 산화한 박종철 열사의 숭고한 뜻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자라나는 많은 후배들이 배우고 기념하기 기원합니다’고 적고 “우리가 누리는 완전한 민주주의는 박종철 열사 등 수많은 희생과 피, 목숨의 대가”라고 언급한 점은 넌센스다.

현재의 국면을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평가한 점도 우습거니와 박 열사를 거론하며 “한 젊은 영혼의 숭고한 뜻이 너무 빨리 잊히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토로한 점도 희화적이다. 지하에 있는 박종철 열사가 그의 언행을 봤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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