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백제 고모루성’ 포천 ‘고모리성’인가(2)
[다시 쓰는 백제사]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백제 고모루성’ 포천 ‘고모리성’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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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반월산성 모형(포천문화원)
반월산성 모형(포천문화원)

고모루성에 대한 연구 사례

국내 학계에서 고모루성에 대한 위치 비정은 백가 쟁명한 실정이다. 지난 2011년 포천 고모리성에서 대진대학 주관으로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대진대학 사학과 서병국 명예교수는 ‘고모루성의 위치 고찰’, 이근영 국문학과 교수는 ‘고모루성과 고모리의 지명에 대한 언어학적 관련성’이란 발표를 통해 고모루성이 포천 고모리 산성이라는 논거를 제시했다.

서 교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辰斯王) 8(392)년 10월조에 700개의 촌락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기사가 있다. 즉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용병에 능함을 알고 싸우려하지 않아 북쪽에 있는 백제의 부락이 거의 고구려군에게 함몰됐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는 고모루성에 대한 3가지 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포천 고모리 산성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포천에는 ‘모루’라는 지명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 백제의 건국 초기 포천 등 동북 변경 일대의 성들은 루(婁)자로 많이 표현되고 있다. 또한 백제의 왕 중에는 다루왕(多婁王), 기루왕(己婁王), 개루왕(蓋婁王) 등 ‘루’자로 표현된 왕도 많다. 이는 ‘루’자의 사용이 백제 사회에서 보편화됐음을 뜻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말갈의 침입을 막는다는 조건으로 도읍지로부터 북쪽으로 100리의 땅을 마한왕으로 부터 받았다. 때문에 이 땅은 백제시대에도 모퉁이로 통용돼 능비에서 보듯 모루(牟婁)·고모루(古牟婁)·구모루(臼模婁)·각모루(各牟婁) 등 모루(로)라고 표현된 성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서 교수는 “문헌조사와 현지답사 및 고고학·언어학적 접근 등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고모루성은 고모리 산성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 시기 백제와의 소규모 전쟁까지 다 수록했는데, 58개성과 700개의 촌락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한 해 동안 점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고모루’와 ‘고모리’의 언어학적인 연관성을 구명한 이근영 교수는 고모리를 ‘고모+모리’로 분석했다. 그는 ‘고모(姑母)’를 ‘한+뫼>한미>할미’의 한자어 표기로 보아, 고모(姑母)와 같은 의미의 한자인 ‘노고(老姑)’의 유래로 알 수 있다고 해석했다. 또 ‘-모루’ ‘-모리’ ‘-머리’ 등은 고대 국어에서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것으로, 어원을 ‘’에 두고 있는 이것은 ‘꼭대기, 위’라는 의미를 갖는다(>말>몰>모리,모루>모이>뫼(山))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고모리의 ‘모리’와 고모루의 ‘모루’는 언어학적으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곰+모루>고모+모루>고모루>고모리’의 변화로 보고, ‘고모+모루’에서 중복되는 ‘모’가 탈락해 ‘고모루>고모리’가 됐다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고모리산성 토루
고모리산성 토루

고모루성 한반도 남쪽 산청설도

마한(馬韓)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은 중국 측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나온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성을 고모루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 학설은 한강에서 가장 먼 지역의 주장이라 주목을 끈다.

일본서기 <계체기(繼體記)>에 기록된 임나 4현 가운데 ‘모루국’이 백제영역과 가까워 가야로부터 빼앗으려고 한 것을 근거로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루’를 백제와 가야의 접경지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백제와 가야의 경계가 지리산임을 생각할 때, 그 위치를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과 산청군 일대로 보는 것이다.

이들 주장은 광개토대왕릉비의 모루성이라는 이름과 <일본서기>에 기재된 가야의 ‘모루’와 한자 표기가 같다는 점도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 <일본서기>의 백제와 가야 관계 기사가 대부분 백제 측기록에 의거한 데 따른 것이다. 4세기 초 백제 관리들은 섬진강 하구의 서쪽에 해당하는 대가야(大加耶) 지역에 진출, 왜와의 교역을 위해 출입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전선을 이용하여 수군 5만군을 이끌고 함양, 산청 지역까지 남진했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간다. 5만군의 기병이나 보병을 배로 이동시키려면 엄청난 조선(造船) 공역이 이뤄져야 한다. 북방 평지에서 주로 기마부대로 속전속결을 수행해온 고구려군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일수 있다.

마홀명문기와
마홀명문기와

정복군주 광개토대왕

한반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던 광개토대왕.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바로 묘호다. 재위 시 영락대왕(永樂大王)으로 불렸으며 '영락'은 최초의 연호다.

386(고국양왕 3)년 태자로 책봉됐으며, 391년 고국양왕 사후에 즉위하였다. 왕은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을 탈환하기 위해 백제의 북쪽을 공격했다. 396(광개토왕 6)년에는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것이 바로 비문에 나타나는 고모루성 정복에 대한 사실이다.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모용희(慕容熙)를 반격하여 신성(新城)·남소(南蘇)의 2성 등 700여리의 땅을 탈취했다. 그 후 후연(後燕)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했다. 407년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高雲)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한 것은 410년 일이다. 왕은 64성을 공파하여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고구려 제일의 영주로서 이 시기 고구려는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갖게 된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412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했다. 우리 사서나 중국 측 기록도 많지 않다.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 광개토대왕 시기를 다룬 <진서>에도 고구려에 관한 별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영웅담이 한족에게는 자존심 훼손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그 업적을 애도했다.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치셨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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