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백제 초기 관방…

400년 왕도 위례성과 함께 운명

포천시 전경(제공: 포천시청)
포천시 전경(제공: 포천시청)

고모루성에 위치 논란

고모루성(古牟婁城)이라 했다. 이 이름은 재미있게도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과 중원 고구려비 등에 등장한다.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이 남진 정책을 통해 한강유역을 건너와 수도 위례성을 공략할 당시 점령된 백제성 가운데 하나다. 백제 초기 관방으로 400년 가까이 왕도 위례성과 운명을 같이 한 고모루.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 ‘고모루’라는 이름은 또 무슨 뜻일까. 우리 주변의 산성 지명을 보면 곧잘 나오는 것이 고모, 대모, 할미 등이다. 이는 모두 같은 뜻이다. 할미는 ‘한메’ 즉 ‘큰 성’에서 음운이화된 것이며 고모(姑母), 대모(大母)는 할미를 한자로 차용한 것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성은 대부분 오래 된 유적이다. 고모루도 오래된 성이며 큰 성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4세기 후반까지 백제의 외곽성으로 튼튼했던 고모루성이 어떻게 무너진 것일까.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종속관계를 유지한 반면, 백제는 왜국과 유대를 강화하여 대립관계가 형성돼 있었다. 백제 가야의 비호를 받은 왜는 바다를 건너 왕도 서라벌까지 깊숙이 침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모루성의 운명은 백제가 왜국과 손을 잡고 고구려의 남진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려는 의도 때문에 바뀌었다. 백제의 기를 꺾은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이다. 기병과 보병을 합쳐 구성된 정예 5만대군은 평양을 거쳐 파죽지세로 백제의 북쪽 변방을 쳐들어왔다. 백제군은 그 위세에 감히 대응을 못했다. 고모루성을 위시한 한강 주변의 많은 백제 관방이 무너졌다. 광개토대왕은 왕성인 몽촌토성을 위협하여 결국 백제왕의 무릎을 꿇리고 말았다.

백제는 그 후 장수왕에 의해 개로왕이 참수된 후 수도를 웅진으로 이도했다. 무령왕대 일부 한강유역의 과거 백제성들이 회복되긴 했어도 고모루성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찾진 못했다. 그것이 백제의 운명이자 백제인들의 한으로 남았다. 고모루성에 대해선 그 비정지역이 너무 많다. 충남 홍성, 덕산, 경기 화성, 충북음성 심지어 멀리 함양 산청 또는 섬진강 유역으로 비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다 지난 2011년 포천지역 역사학자들이 ‘고모리 산성’을 고모루성으로 비정하고 본격적인 조사활동을 벌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포천시는 그동안 이 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지속적인 조사 연구 작업을 진행 중이다. 포천 지역에는 고모리 산성 외에 성동리 산성, 고소성(姑蘇城), 대전리 산성(大田里山城, 지금은 연천군) 등 옛 성터가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입증한다. 대전리 산성은 신라 때 매초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며, 675년 말갈군을 앞세운 20만 당 대군을 물리친 승전지다.

광개토대왕비문(제공: 이재준 역사학자)
광개토대왕비문(제공: 이재준 역사학자)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

“백잔(百殘.백제)과 신라(新羅)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하고(2字缺) 신라(新羅)…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 利城), ▨▨성, 각미성(閣彌城), 모로성(模盧城), 미사성(彌沙城), ▨사조성(▨舍 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혈▨▨▨▨성(頁▨▨▨▨城), ▨이야라성(▨而耶羅城), 전성( 城), 어리성(於利城), ▨▨성, 두노성(豆奴城), 비▨▨리성(沸▨▨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 루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임성(林城), ▨▨▨▨▨▨▨리성(▨▨▨▨▨▨▨利城), 취추성(就鄒城), ▨발성(▨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 穰城), 증▨성(曾▨城), ▨▨노성(▨▨盧城), 구천성(仇天城)…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하략)”

기록을 보면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 6(396)년, 왜군이 침입하여 속국 신라의 신민을 사로잡는 것에 분노하여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으며, 이때 점령된 여러 성 가운데 하나가 ‘고모루성’임을 밝히고 있다. 또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생구(南女生口) 1천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太王)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했다….(하략)”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고무루성과 같이 기록된 58개의 성이다. 그 중에서 아단성(阿旦城)은 남한강 상류인 충북 단양, 윤노성(閏奴城)은 지금의 강원도 양구로 비정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1년 동안 양구 비봉산성을 여러 차례 조사한 바 있다. 포곡식성 형태를 이룬 비봉산성 안에서는 한강 아차산성, 연천 호로고루성 등에서 출토된 고구려계의 평 와편을 수습한 바 있다. 이기와들은 사선문(斜線文), 격자문(格子門), 방격문(方格文)으로 평양성이나 만주 지안 환도성 등에서 수습된 기와 문양과 거의 같았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감안한다면 고모루성도 북한강 수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왕이 고모루, 아단성, 윤노성을 정벌한 후 한강인 아리수를 넘어 수도에 육박한 기록을 보면 고모루성의 위치는 한강유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난 70년대 찾아진 한반도 유일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도 고모루성이 대형(大兄) 관등인 수사(守事)라는 지방관이 파견되어 다스린 성으로 나오고 있다.

‘수사’라는 관직은 광개토왕대에 ‘대사자(大使者) 모두루(牟頭婁)가 북부여(北夫餘)에 파견되었다’는 기록(墓誌)이 있다. 이로 볼 때 장수왕대에 수사(守事)가 파견된 고모루성이 당시에도 비교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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