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가톨릭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학문과 예술의 옳고 그름은 당연히 가톨릭교회(로마 교황청)가 판단했다. 당시 누구나 천동설을 믿어오던 시절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하는 지동설을 믿고 주장했다. 로마 교황청은 법정에서 갈릴레이에게 앞으로 지동설을 유포하며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법을 어길 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는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겨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또 그 이전 예수가 이 땅에 초림으로 와 하늘의 진리를 전해도 당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 나아가 유대인들은 당시 자신들이 믿고 지키던 율법만을 고집하며 예수를 이단이라 욕하고 핍박하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당시 그들이 믿던 율법은 장차 이룰 예언이었으며, 따라서 예수는 그 예언대로 왔고, 나아가 그 예언대로 오신 자신을 소개하고 이해시켰으니, 이를 진리라 했던 것이다.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이치같이, 예언의 말씀은 때가 되어 자기 땅에 예언(말씀)이 육신이 되어 왔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보자. 갈릴레이의 주장도 예수의 증거도 그야말로 만고불변의 진리가 되어 지상 만민이 믿고 따르는 기준이 되고 처지가 된 것이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제 다른 얘기를 해 볼까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성숙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민주제도를 유지시켜 올 수 있었던 수단 중에 괄목할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다수결의 원칙’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 초림이나 중세나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믿고 주장하던 이론들은 진실도 정의도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다시말해 다수 내지 다수결은 수단일 뿐 진실과 정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진실과 정의, 이 단어와 표현이 요즘처럼 많이 회자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진실과 정의는 작금에 와서 심히 왜곡되고 모독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과 정의를 인정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론을 조작해 포털의 실검을 장악하는 행태, 그리고 그것이 마치 국민의 여론인양 호도하는 정치 사회 문화, 언제부터 이 나라가 이처럼 몰지각한 나라가 됐을까. 

최선과 차선이라는 말이 있다. 당연히 ‘최선’은 진실과 정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진실과 정의는 장래에 나타날 일이기에 차선책인 다수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진실과 정의를 여론몰이라는 방법을 동원해 선동과 책동의 도구로 오용해선 안 된다. 

청와대의 청원도 그렇고 과거 드루킹 사건도 그러한 오해에서 피해가지 못하는 이유다. 그것은 건전한 여론이 될 수 없으며, 모리배(謀利輩)들을 앞세워 여론을 몰아가니 분명 여론 조작인 것이며, 이러한 여론 조작으로 여론을 왜곡시켜 그것이 진실이며 정의라는 인식을 심어주자는 데서 기인된 것이다. 이는 다수의 의견이 마치 진실과 정의라는 그릇된 가치관이 나은 국가적 사회적 참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검찰을 향해 ‘정치 검찰’이라는 닉네임을 붙이고, ‘엿과 꽃’으로 도가 넘은 모욕을 주며, 실검을 띄우며 마치 대다수 국민의 생각인양 호도하고 몰아가니, 진정 정의는 죽은 것이다. 오직 내 맘에 드느냐 들지 않느냐, 내편이냐 네 편이냐가 진실과 정의의 잣대가 되는 이상한 나라, 비겁한 나라, 한심한 나라가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실검에 올라가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참 국민은 신중한 자세로 돼가는 행태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른단 말인가. 그곳에 진실이 있고 정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왜 못해보는가. 진정한 국민은 절대 모리배들의 장단에 춤을 추지 않는다.

과거 정부가 쌓아온 적폐는 어쩌면 무식한 적폐라면 현 정부가 쌓아 올리고 있는 적폐는 야비하고 비겁한 적폐가 아닌가 싶다. “그 나물의 그 밥”이라는 속담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고,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스쳐지나가며, 또 경서의 가르침인 “들보와 티”의 교훈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 건 어째서일까. 

진실공방은 진영공방이 되어 진실과 정의를 모독하는 유치한 세상을 국민들은 구경 한번 잘하고 있는 것이다. 통치자의 내편만이 아닌 국민통합의 메시지와 행보가 담긴 진정한 언행일치가 그리워지는 때, 그 갈급함을 누가 대신해서라도 적셔줄 이는 없을까. 모두가 정신을 차리는 그 날까지 처한 현실과 시대를 분별시키기를 다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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