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 길 잃은 영국 정치, 벼랑 끝에 서다
[정치평론] 길 잃은 영국 정치, 벼랑 끝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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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병 정치평론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영국 정치가 길을 잃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됐던 영국 의회는 요즘 ‘소모적 정쟁’으로 한편의 코미디 같은 일들이 연일 반복되고 있다. 브렉시트(Brexit) 문제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메이(Theresa May) 총리가 끝내 물러나고 존슨(Boris Johnson) 총리 시대를 맞았지만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아니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슨 총리의 경우 브렉시트 해법을 놓고 이전의 메이 총리보다 더 강경한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지만 문제는 그의 리더십이 전혀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내각제 국가인 영국은 내각과 의회가 종종 ‘국가’를 대표하는 문제에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있다. 집권당이 다수의 권위로서 의회에서 확실한 우위에 있다면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지금처럼 집권당이 무기력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의회에서 힘이 강한 야당이 내각의 국정운영에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영국 의회는 야당의 힘이 더 강했다. 새로운 브렉시트 합의안을 위해 자신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외치던 존슨 총리 면전에서 보수당 소속의 중진인 필립 리 의원이 의사당 내 의원석 맞은편의 야당석으로 가서 앉았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현장에서 당적을 옮긴 것이다. 이 1석은 단순한 1석이 아니었다. 보수당은 민주연합당(DUP.10석)과의 연정을 통해 과반수(320석: 표결권 있는 의석수 중심)를 겨우 유지해 왔었다. 그러나 필립 리 의원의 당적변경으로 순식간에 과반의석이 무너진 셈이다(319석). 이 모습을 지켜본 존슨 총리는 순간 당황했겠지만 당연히 야당석에서는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이날 존슨 총리의 호소나 리더십이 사실상 조롱을 당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보수당과 존슨 총리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향후 EU와의 새로운 브렉시트 논의 등의 의사일정을 놓고 내각과 의회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쥘지를 놓고 투표로 결정하자는 안건이 제기됐다. 집권 보수당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제안을 받은 셈이다. 이에 존슨 총리가 “노동당 코빈 대표 주도로 EU에 항복하겠다는 법안”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보수당에서 무려 21명이나 이탈하면서 찬성 328표, 반대 301표로 통과됐다. 과반의석이 무너지더니 총리 취임 이후 첫 투표에서도 보수당 소속 의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존슨 총리는 완패하고 말았다. 의회 권력이 존슨의 행정부 권력을 이긴 것이다.

이에 존슨 총리는 보수당에서 이탈한 21명을 출당시키기로 하면서 붕괴 위기에 처한 리더십을 복구하려 했지만 상황은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이튿날인 4일 오후 영국 하원은 노동당의 힐러리 벤(Hilary Benn) ‘브렉시트특위’ 위원장이 제출한 ‘유럽연합(EU) 법’에 대한 표결을 실시해 찬성 327표대 반대 299표로 가결시켰다. 이 법은 10월로 예정된 EU정상회의 다음날인 10월 19일까지 영국 정부가 EU와의 브렉시트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노딜(no deal) 방지법’이다. 만약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브렉시트 일정을 또다시 3개월 연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동안 존슨 총리는 10월 31일로 예정된 브렉시트를 무조건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날 투표로 존슨 총리의 구상에 결정적인 차질이 생긴 셈이다.

사실 존슨 총리는 지난달 28일 노동당 입김이 센 의회가 내각이 주도하는 브렉시트 협상을 막지 못하도록 5주간 의사일정에 대한 정회를 선언해 놓은 상태였다. 이를 통해 당초 약속대로 10월 말까지 의회의 방해 없이 브렉시트를 차질 없이 이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존슨 총리는 보수당 내부의 반발과 이탈 그리고 리더십 부재의 정치일정을 밀어붙이다가 결국 ‘되치기’를 당하고 만 셈이다.

총리 자리에 오른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존슨 총리에겐 치욕적인 상황이나 다름 아닐 것이다. 존슨 총리가 “‘노딜 방지법’이 통과되면 조기총선을 실시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도 조기총선 카드를 통해 난국을 돌파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존슨 총리가 제출한 조기총선 동의안은 기본요건인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 찬성 298표, 반대 56표로 과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결됐다. 야당인 노동당 의원들 대부분은 아예 기권해 버렸다. 이로써 결국 최소 10월 말까지는 브렉시트도, 조기총선도 그리고 내각의 주도권도 모두 놓쳐버린 채 존슨의 영국 정치는 다시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제는 노동당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브렉시트 문제로 가시화된 영국 정치의 한계는 최근 민주정치의 시스템 문제로 언급되기도 한다. 포퓰리즘에 쉽게 흔들리는 국민투표와 그 결과를 의회민주주의 틀에서 구현해야 하는 정치과정은 근본적인 혼란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오랜 세월 정치적 특권을 지켜왔던 거대 기득권 정당들이 급변하는 국민적 요구에 유연하게 화답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정치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체질을 바꾸기엔 그 덩치와 특권이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제3의 정당’이 급부상하는 유럽의 정치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국 정치도 오래 전부터 벼랑 끝에 섰다는 생각이다. 존슨 총리도 별 수 없다면 이것은 ‘구조의 문제’가 더 결정적이다. 결국 조기총선으로 가더라도 영국 유권자들이 이번만큼은 영국 정치의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 낼 것인지가 관건이다. 의회도, 정부도, 국민도 지쳐버린 영국의 민주정치 현실, 과연 그 출구를 어디서 찾을지 참으로 궁금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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