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군주와 신하는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지만, 경쟁상대이기도 했다. 특히 권력을 장악한 신하는 군주에게 방심할 수 없는 정적이다. 군주는 신하의 충성심을 검증하기 위해 고육계를 사용하기도 한다. 북송 초기 송태조 조광윤은 제위에 오르자 인심의 향방과 권신들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차례 몰래 잠행했다. 건륭원년(960), 그의 잠행이 특히 잦았다. 12월 어느 날, 조광윤은 후궁의 원림에서 참새를 잡으면서 놀았다. 마침 조정의 근신이 긴급한 공무가 있다고 알현을 요청했다. 일상적인 일에 불과했다. 조광윤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 신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조용히 말했다. “신은 참새를 잡는 것보다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광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활로 그의 입을 때려 차아 두 개를 깨뜨렸다. 권신은 천천히 몸을 굽혀 치아 두 개를 품안에 넣었다. 그것을 본 태조가 욕을 퍼부었다. “그 치아를 증거로 나를 관청에 고발할 것이냐?”

“어찌 군주를 관청에 고발하겠습니까? 그러나 사관이 이 사실을 역사에 기록할 것입니다.”

조광윤은 노기를 풀고 웃으면서 그의 충정과 올곧음을 칭찬하고 상을 하사했다. 개국군주 조광윤은 고육계로 권신의 충정과 간사함과 품격을 시험했다. 군주와 신하 모두 위망을 높였으며, 조광윤 자신은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였다는 미명을 얻었다.

군주는 신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지녔다. 권신은 군주를 경외하며 조심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황권과 신권의 정치적 각축전에서 자기가 보유한 권세와 특권을 유지하고,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고육계를 사용했다. 그들이 물러남으로써 나아가는 수법을 자주 사용했다. 즉위 초기에 조광윤은 전왕조인 후주의 구신들을 후하게 대우했다. 후주의 재상 범질(范質)을 수상, 왕부(王溥)를 차상, 위인포(魏仁浦)를 말상으로 삼아, 충심으로 자기를 도와 천하를 다스리게 했다. 중대한 일이 있으면 재상과 대신들을 불러서 상의하고, 끝나면 차를 신하들에게 하사한 후 물러갔다. 당왕조와 오대시대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중되었다. 그러나 범질 등은 거기에 포함된 정치적 위험요소를 깊이 깨달았다. 조광윤의 정치적 수완과 뛰어난 결단력이 두려웠다. 발언의 기회를 주었다고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은 순진한 짓이다.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모두 글로 적어서 올리고 성지를 들으면서 친히 결정하도록 미루었다. 조광윤은 그들의 요청을 즉시 받아들였다. 재상들이 정무의 예를 논할 때는 궁중에서 황제와 함께 처리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정무에 대한 모든 대권은 황제 한 사람이 누리게 했다. 노회한 그들은 자기에게 넘어온 대권을 황제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정치적 피난처를 마련했다.

‘짐은 곧 국가’라는 전제군주 치하에서는 첨예하고 복잡한 정치투쟁이 전개되었다. 군주는 그것을 이용해 신하를 통제했다. 두의(竇儀)가 저주(滁州)에 있을 때 조광윤이 견백(絹帛)을 요구하자 거절한 적이 있었다. 조광윤은 두의가 직분을 다했다고 칭찬하며 재상으로 임명했다. 나중에 재상이 된 조보(趙普)가 전권을 휘두르자 조광윤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두의를 불렀다. 그러나 두의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조광윤에게 조보를 충신이라고 칭찬했다. 불쾌했던 조광윤은 차 한 잔도 마시지 않고 물러갔다. 귀가한 두의는 아우들을 불러서 당부했다.

“재상이 될 수도, 유배될 수도 없다. 이후로 우리 집안은 안전할 것이다.”

조보는 조정에서 동료인 두의의 강직함을 꺼렸다. 그는 설거정(薛居正)과 여경여(呂慶餘) 등 자파를 끌어들여 두의를 배제했다. 두의가 세상을 떠나자 조광윤은 몹시 슬퍼하며 한탄했다.

“하늘이 왜 이렇게 빨리 나에게서 두의를 빼앗는가?”

권력의 향방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조국의 임명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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