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1989년 8월 23일 오후 7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국민 200만명은 세 나라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 620㎞를 인간 띠로 잇고 “자유를 달라”고 15분간 외쳤다.

이 날은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불가침 조약’ 체결 50주년이었다.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북·동유럽을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별도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소련이 폴란드 동부, 핀란드, 발트 3국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1940년 6월에 발트3국을 점령했다.

한편 1988년에 ‘독소 비밀의정서’가 처음 공개되자 발트 3국 국민들은 분노했다. 1989년 5월에 발트3국 민족주의자들은 ‘발트 총회’를 열고 소련 정부에 불법 점령사실 인정을 요구했다. 6월 15일에는 발트3국 민족주의자들은 페르누 회담에서 ‘발트의 길’ 행사를 합의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준비도 충분하지 않았고 국민들이 얼마나 참여할 지도 미지수였다. 더구나 이를 저지하려는 소련의 무력 침공도 걱정이었다. 실제로 행사가 열리기 8일 전인 8월 15일에 ‘프라우다’ 신문은 ‘행사금지’ 기사를 냈고,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대통령이 소련에 병력 지원을 약속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발트의 길’ 행사는 예정대로 실시됐다. 발트 3국 국민들은 도로변에서 손에 손을 잡고 국기를 흔들며 ‘자유’를 외쳤다. 민간비행기가 하늘에서 역사적 장면을 촬영했고, 이 행사는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자유를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인 ‘발트의 길’은 영향이 컸다.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10월 3일에 독일이 통일됐다. 발트 3국은 1991년 8월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쟁취했고, 결국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 12월 26일에 해체됐다. 이후 ‘발트의 길’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자유·평화운동의 모델이 됐다. ‘발트의 길 30주년’인 8월 23일 오후 7시, 홍콩 시민 13만 5천명은 45㎞의 인간 띠를 잇는 ‘홍콩의 길’ 시위를 했다. 이는 6월 9일부터 3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평화시위는 잠시였다. 8월 25일부터 시위는 격화돼 극한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9월 2일부터 시작된 총파업, 동맹휴학, 상점 철시 등 ‘3파(罷)투쟁’은 연일 확산되고 있다. 9월 3일엔 항공·금융 등 29개 업종 4만명이 파업했고, 대학생 3만명, 중·고등학생 1만명도 거리로 나섰다. 12세 소년도 쇠파이프를 들었다.

홍콩경찰은 강경진압과 주모자 검거 일색이다. 홍콩정부는 계엄령 발동, 중국 정부는 인민해방군 투입을 예고했다.

이럼에도 홍콩시민들은 미국 독립전쟁 때 패트릭 헨리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한 연설, 미국 워싱톤 DC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새겨진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글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침내 9월 4일에 홍콩 행정장관은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했다. 자유를 갈망하는 홍콩 시민의 승리였다. 이제 자유를 위한 홍콩 시민의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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