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북한의 국가 이름은 여전히 조선이다. 구한말 나라가 무너질 때의 이름 그대로이다. 이성계가 세운 나라는 무려 500년이나 지속하였지만 구한말이 끝이었다. 쇄국과 권력다툼이 나라를 말아먹었다. 오늘도 북한은 여전히 쇄국이다. 김 씨 왕조의 카리스마로 3대 세습은 ‘안정’돼 보이지만 인민대중과 평양권력은 각자 갈 길을 따로 가고 있는 형국이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가끔 북한 권력의 500년, 나아가 천 년 지배를 어필하고 있다. 최소한 북한의 운명을 500년 이상 끌고 가겠다는 속셈이다. 그러나 현재의 전략으로 북한은 500년은커녕 앞으로 30년을 넘길지 걱정이다. 북한은 번영을 거듭해온 대한민국의 국가발전 전략을 따라 배워야 할 것이다.

한국의 국가 생존 전략이 구체화한 첫 사례로 ‘고슴도치론’이 꼽힌다.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의 살 길은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고슴도치가 되는 길뿐”이라며 자주국방을 강조한 것이 체계화됐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 이보다 앞선 1963년 “고슴도치는 온 몸이 가시로 덮여 어떤 짐승도 달려들지 못하는데, 우리도 전체 인민을 무장시키면 미국도 접어들지 못한다”고 언급한 대목이다. 생존과 자주권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는 약소국으로서의 남북한 전략은 동일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복잡하게 얽혀 가는 한반도 주변 정세를 보면 한국의 국가전략이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의문이 든다. 일본의 경제보복과 미국의 동맹 무시, 중국·러시아의 군사적 위협, 북한의 ‘남한 패싱’ 등 동시다발적 위협은 미증유의 위기국면이다.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잡기 어렵다. 사방에서 돌출하는 현안을 처리하는데 방향을 잡아줄 전략이나 개념 없이 표류하고 있는 느낌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한 외교 전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균형자론’이 대표적이다. 미중 사이에서 산술적으로 등거리에 위치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한미동맹의 공동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인 전략이다. 노무현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ABR(Anything But Roh)’를 내건 이명박 정부는 대미 편향 외교로 일관했고, 박근혜 정부는 ‘균형외교’라는 명분에도 우왕좌왕하다 된서리를 맞았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동북아균형자 역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관된 원칙이나 기준 없는 임기응변 전략도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 값비싼 교훈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전략은 어떤가.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남북관계를 진전시켜 동북아 안보지형을 변화시키겠다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방향은 옳다. 북한 비핵화와 남북 협력을 통해 주변 열강에 ‘흔들리지 않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취지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평화경제’나 ‘교량국가’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이 구상의 대전제는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이다. 만약 이 같은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평화프로세스의 기반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의 북한 행태는 우리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키운다. 게다가 남한을 겨냥한 잇단 신종 무기 시험과 막말 비난은 비핵화 이후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대미 관계 개선과 대일 수교 협상으로 얻은 안보와 경제 분야 이익을 토대로 남한과 본격적인 체제경쟁을 펼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국제 질서는 대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2차 대전 직후 형성된 기존 질서가 흔들리고 세계 각국이 ‘자국 우선주의’로 대응하면서 혼동이 일상화하고 있다. 한국 외교가 당면한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도전을 북한에만 의존해 풀려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지난달 29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2차 회의를 열어 김정은의 국무위원장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만큼 일인독재체제에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반증이다. 조선의 운명은 저만치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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