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부의 대물림’ 지도층 입시 부정
[이재준 문화칼럼] ‘부의 대물림’ 지도층 입시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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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은 개국 5백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숙적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는 수모를 당한다. 세계 변화를 읽지 못한 임금, 백성들을 수탈했던 탐관오리들, 군사력의 열세, 빈곤한 경제력의 결과였다. 

부의 대물림인 과거(科擧)제도의 비리도 망국의 요인이었다. 그래서 국가는 인재 기근이 심각했다. 훌륭한 인재들은 산으로 숨고, 제도에 비판 적인 지식인들은 외딴 섬으로 귀양 보내 격리시켰다. 국가의 부(富)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실학이 발전될 수 없었다. 

과장(科場)에서 나눠주는 시험지는 공정을 가장한 세도가들의 비밀기호였다. 답안지 상단에 이름을 쓰고 접어 가린 곳에 수험자의 5대 조상까지 이름을 적는다. 채점관이 이름을 펴 보면 금방 어느 집안 자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족 부모들이 만든 대물림 획책이었다.

과거 현장에는 입시부정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과거시험의 부정행위 기록은 조선왕조 초기인 태종 때도 있었다. 권력층의 아들이 과거를 봤는데 시험관이 답안을 고쳐 써 적발되었다. 다시 말하면 논문을 대리로 써준 경우와 같다. 

숙종31년(1705년) 2월 18일의 기록을 보면 부정방법도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대나무 통을 땅에 묻고, 그 안에 노끈을 넣어서 시험문제와 답안지를 외부로 유출하여 대리 시험을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탐관오리들은 상민(常民)이라도 돈을 주면 양반을 만들어 주고 공명첩 까지 내렸다.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진다. 

보다 못한 실학자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는 과거제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한다. 초정은 젊은 시절부터 명성이 있었으나 서얼출신이라 높은 벼슬에 기용될 수 없었다. 초정은 과거시험의 과목과 출제방법까지 개혁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집권자들은 귀를 막고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초정의 제자로 어린 시절부터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정의로운 그는 40대에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비인현에 나가 세도가 출신 탐관오리 김우영을 봉고파직 시켰다. 추사는 김씨 일파의 모함을 받아 9년간이나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추사는 시(詩)를 통해 세도정치를 비난하고 그들에 의해 핍박받는 선비들의 비참한 삶을 비유했다. 필자는 최근 추사 글씨 한 점을 찾았는데 바로 명나라 말기 전겸익(錢謙益)의 시 ‘유계(柳溪)’의 끝 부분에 차운(次韻)한 것이었다. 

여기서 추사는 통렬한 분노를 토해내고 있다. 추사체 특유의 기묘(奇妙)한 글자 안에 수렴청정과 사대부들의 탐욕을 그려 넣었다. 수년전 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추사코드’의 한 유형으로 평가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주소는 어떤가. 인재를 양성하는 명문대학이라는 곳에서 위선적인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과거 조선시대의 과거부정과 무엇이 다른가. 

젊은 지성들의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아도 이를 비웃는 지지층의 행동은 실소를 머금게 한다. 지금 그들은 판단력이 있기는 한가. 이제는 대통령 아들까지 나서 후보를 지원하고 나서 모양새를 구겼다. 비리에는 추상같았던 추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떤 시를 썼을까. 대학이 권력에 힘을 쓰지 못하고, 학자들이 정실에 치우쳐 입시생 논문까지 대필했으니 아마 통곡의 시를 썼을 게다. 

대통령은 입시 비리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조국후보를 임명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통령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적폐를 쌓는 것과 같다. 지금 얼마나 많은 국민과 청년들이 거리로 나와 성토하고 있는가. 망한 과거 조선의 역사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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