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주덕읍 다인철소 유적을 관통하는 요도천
주덕읍 다인철소 유적을 관통하는 요도천

임나국 요도천과 백제의 철기문화

충주시 주덕면 일대에는 예부터 ‘다인철소’라고 불린 고대 철기유적이 있다. 고려사에 보면 ‘충렬왕 3(1277)년 4월에 원(元)에서 환도(還刀) 천자루를 요구하자 고려에서는 이것을 충주에서 주조케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바로 충주란 다인철소를 지칭한 것이다.

고종 42년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다인철소 노비들은 남산성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이 공으로 조정에서는 소(所)를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충청도 안찰사를 지낸 최자(崔滋)는 삼도부(三都賦)에서 다인철소의 야철을 높이 치하하는 글을 남겼다.

“중원(中原, 충주)의 철은 빈 철(鐵), 납, 강철, 연철을 내는데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흘러나와 뿌리와 그루를 찍고 파내되 무진장 끝이 없네. 홍로(洪爐)에 녹여 부으니 녹은 쇠가 물이 되어 불꽃에 달군 양문(陽紋), 물에 담근 음문(陰紋)을 대장장이 망치 잡아 백번 천번 단련하니 큰 살촉, 작은 살촉, 창도 되고 갑옷도 되고, 칼도 되고 긴 창도되며, 화살도 되고 작은 창도 되며, 호미도 되고 괭이도 되며 (하략)”

충주시 이류면에서 주덕에 이르기까지 요도천 일대를 답사하면 발에 채는 것이 철 제련 부산물인 슬러지다. 다인철소의 광대한 철기유적의 잔영들이다. 왜 이곳이 이처럼 한반도 최대의 우수한 철기 생산지로 각광을 받은 것일까. 가야국은 철기왕국으로 불린다. 뛰어난 철기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왜국에 수출까지 했다. 고대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철기의 면면을 보면 양과 질 면에서 이웃 신라, 백제를 월등히 앞서고 있다. 일부 고대사 학자들은 가야국의 하나였던 임나국이 일본에 철기를 수출했던 공급 기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도천 일대가 바로 김정호가 대동지지에서 기록한 임나국의 고지는 아닐까. 임나는 한·일 학자 간 해묵은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임나는 본래 ‘임나가야’의 줄임말이다. 그 본명은 미마나(彌摩那)인데, <일본서기>에 ‘미마나일본부’ 등으로 기록된 것을 근거로, 일본 학계가 일본의 가야 지배설을 주장하여 온 것이다. 그런데 김정호는 왜 충주를 임나국의 고지라고 했을까.

신라 문무왕 때 가야 귀족 출신이었던 강수(强首)는 대장장이 딸을 사랑했다. 그리고 귀천을 초월해 그녀를 천생 배필로 삼았다. 강수는 후에 문무왕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자신은 중원경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고 출신지를 밝혔다. 김정호는 이 대목에 착안하여 충주를 임나국의고지였다고 기록한 것은 아닐까. 진흥왕 시기 충주에서 고구려 세력을 몰아낸 신라는 많은 가야인을 이주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가야인들은 철기를 잘 다루었으므로 이들을 철광석이 많이 나는 요도천에 안치하고 필요한 무기를 양산했을 게다. 강수는 가야인들 가운데 성분이 좋은 귀족이었으며 신라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것 같다. <삼국사기> 강수 조에 나오는 그가 살았던 중원경 사량과 대곡마을은 지금의 주덕이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주덕에는 요도천 북편에 ‘사락리’ ‘화곡’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사락리는 바로 ‘사량(沙良)’의 이칭이 아닐까. 즉 사락리는 강수가 살았던 ‘사량’이고 화곡은 철을 제련했던 ‘화곡(火)으로 상정된다.

주덕읍 사락리 토성
주덕읍 사락리 토성

일본에서 주덕은 백제 근초고왕 시기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만들어진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일본 HNK방송은 지난 80년대에 특집을 통해 ‘백제 수도에서 서쪽 200리이면 뭍이 아닌 바다가 된다’며 이를 ‘동쪽 200리의 오기로 볼 경우, 충주 지역을 칠지도 제작지로 볼 수 있다’는 추정을 내놓은 바 있다. 주덕면 일대에서 채집한 선철의 부스러기가 칠지도의 철 성분과 가장흡사하다는 과학적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奈良縣)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는 길이 74.9㎝의 백제보검이다. 1953년에 일본국보로 지정되었다. 칼의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어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칠지도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시기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뛰어난 백제의 제철 기술을 보여준다.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 칼로, 칼몸(刀身)의 앞·뒷면에는 61개의 글자가 금상감(金象 嵌)으로 새겨져 있다.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면) “태□(泰□) 4년 □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후왕(旨를 가리킴)에게 줄 만하다.”

(뒷면) “선세(先世) 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자왕(百慈王)은 세세로 기생성음(奇生聖音: 길상어)하므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

요도천 다인철소 유적은 지금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 일부 유적에 충주산업단지가 들어서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다. 백제 문주왕의 설화가 어린 안림동 충주시 계명산록에 속칭 안림동이란 곳이 있다. 안림동은 안심리(安心里)·범의동(凡衣洞)·어림리(御林里)·교동(校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생겨난 마을이다. 안심리는 예부터 피난지로 안전한 곳이라 하여 안심이라 불리었다. 어림리는 백제 문주왕이 가행궁을 짓고 한때는 이도를 계획했던 곳이란 전설이 내려온다. 과연 이곳이 부왕인 개로왕을 한강 위례성에서 잃은 문주왕이 가궁을 짓고 수도를 옮기려 한 곳일까.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곳의 지형은 일본 후쿠오카(福岡)가 태재부 성이 있는 지역과 너무나 흡사하다. 태재부는 백제가 멸망하고 도래한 귀족들이 대야성을 쌓고 관청을 만든 유적이다. 일본 문화재 당국은 수십 년간 이 유적을 발굴 중이며 많은 백제계 유물이 빛을 찾았다. 태재부에는 백제인들이 쌓은 수성(水城)이 있다. 현재는 방형의 토루(土壘)이지만 축조 당시는 태재부를 방어하기 위해 길이 1㎞, 폭 8m, 높이 14m로 물을 가득 담았다고 한다. 이 수성방식은 일본 고대 성곽구축의 기본이 되었다.

학계 일부에서는 안림동 일대 유적은 문주왕 설화가 이야기하듯, 백제시기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신라 문무왕의 중원경 축조와 관련 6부의 호민들이 이주하여 산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기 국원경 자리를 지금의 탑평리로 비정한다면 신라 통일 이후 중원경성의 고지는 이곳, 안림동으로 상정된다는 것이다. 바로 충주의 진산이라는 대림산성과 이웃하고 남산성과도 가깝기 때문에 유사시 성민의 안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70년대 중반 안림동 일대의 건물지에서는 매우 주목되는 고 와당(瓦當)이 무더기로 출토된 적이 있었다. 삼국시대 신라 와당으로 바로 경주 황룡사지나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형의 기와처럼 정연하고 아름다운 기와들이었다.

이곳에서 초기 백제사의 비밀을 풀 유적·유물이 찾아질 가능성이 있다. 더 파괴되기 전에 보존 조치가 필요하며 확대된 학술조사를 통해 실체를 파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동경박물관에 소장된 가야계 철갑(사진 제공: 이재준 역사연구가)
일본 동경박물관에 소장된 가야계 철갑(사진 제공: 이재준 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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