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초기 주 무대 ‘낭자곡’은 충주인가(2)
[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초기 주 무대 ‘낭자곡’은 충주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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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대림산성 서문지에서 바라 본 달천
대림산성 서문지에서 바라 본 달천

속칭 낭재, 대림산성 기록과 유물

충주시 살미면에 있는 대림산성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한다. 즉 ‘世宗大王實錄, 卷第百四十九 忠淸道 忠州牧 大林山 州人以爲鎭山 上同書 烽火四處… 大林城西淮馬山…’라고 하여 이미 조선 초기 세종대에 대림산성이 있었으며 이곳이 봉화대로 사용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성지 조에도 “大林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638척이고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폐하였다.”고 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忠州 城池 南十五里周九千六百三十八尺井一’이라고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말기에 편찬된 충청도 읍지 <충주목조>에는 ‘烽燧 大林山烽燧 在州南十里南應延豊周井山西應馬山別將一人監官五人軍人一百人’이라고 하여 대림산 봉수에는 별장 1명, 감관 5명, 군인 100명이 상주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충주면 호암리, 살미면 향산리 성지는 대림산성이라 짐작되는 것의 일부로서 천험의 암벽을 이용하는 둘레 약 1800칸의 석성지로 거의 붕괴되어 도처에 와편이 산재하여있다. 봉수는 대림산 봉수라 짐작되는 원형의 석루 2단이 있다. 2단을 합한 현재 높이는 30척(尺)이고 규모가 크다.’고 하였다.

표고 497.5m인 대림산은 충주의 진산(鎭山)으로 회자된다. 진산이란 일단 유사시 백성들을 보호하는 산이라는 것이다. 이 산은 남산(南山)과 계명산(鷄鳴山) 그리고 원앙봉 등과 함께 충주분지를 남쪽과 동쪽에서 감싸 안고 있다.

대림산에 축조된 산성의 둘레는 약 5144m나 된다. 동서로 길게 뻗으면서 신라 문무왕 시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산성과 계명산을 연결하고 있다. 바로 중원경 고지인 충주읍성의 남쪽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다. 이곳을 방어하면 남북으로 진격해 오는 적을 쉽게 저지할 수 있다. 즉 충주지역에서 계립령을 넘어 경상도 쪽으로 남하하거나, 계립령을 넘은 적이 충주 쪽으로 진입하는 것을 방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략적인 위치라는 점이다. 고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성을 중요한 요새로 삼음직하다는 것이다.

대림산성의 서쪽은 달천 강변에 접해 매우 험준하다. 즉 달천을 해자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적이 서쪽에서 성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다. 좌우의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면 서문지는 매우 비좁아 난공불락의 요새로 보인다. 성벽은 대부분 삼국시대 유행한 토석혼축(土石混築)을 보여주고 있으나 고구려나 신라의 축성법인 석축성 유구도 많이 남아있다. 돌을 벽돌처럼 정연하게 다듬어 비스듬히 쌓은 것이다.

충주시 안림동 토성지의 판축 유구
충주시 안림동 토성지의 판축 유구

대림산성 조사 보고서에는 모두 10여 개소에 달하는 건물지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여러 곳에서 망대지가 보이며, 건물지로 보이는 곳의 경작지에서는 다수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성안에는 예부터 ‘대궐터’라 전해 내려오는 곳도 있다. 백제, 고구려, 신라의 왕들이 이곳을 행행할 때 묵었던 가궁(假宮)이 있었던 곳은 아닐까. 혹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흥왕의 가궁 하림궁과 연결하여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진흥왕이 상주를 넘어 ‘괴산-달천’을 통해 국원에 행행했을 것을 가정한다면 이 부근에 이주하여 살던 가야세력 안의 우륵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림산성은 조선시대에도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조령새재를 넘어 온 왜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적들이 계획을 알아차리는 바람에 효력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성 밑을 지나지 않고 달래강 상류에서 강을 건너 맞은편 풍동을 지나탄금대로 진격했다는 것이다.

글마루 탐방팀은 성안에서 백제 초기에 해당하는 연질 토기, 승문 토기 와편을 찾는 수확을 거뒀다. 특히 연질의 적색토기편과 회백색의 승문 토기 등은 백제 고신라 토기의 편린으로, 이 성의 ‘낭성’ 추정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것이다.

대림산성 내 유지(대궐터 등)에서 찾아진 백제, 고구려, 신라계 와편과 토기편
대림산성 내 유지(대궐터 등)에서 찾아진 백제, 고구려, 신라계 와편과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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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 2019-08-29 22:41:25
고조선에서 파생해온 주몽의 아들들이 백제의 시조가 된 건 알겠는데 지명이 어디인지는 몰랐죠? 충주쯤이면 맞지 않을까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한국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세계여행 못지 않은 배움일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