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숱한 비밀 간직한 나냉이고개, 대림산성을 가다

삼국의 쟁패지역 낭성… 우륵의 가야금 향훈

대림산성 서문지에서 바라 본 달천
대림산성 서문지에서 바라 본 달천

<삼국사기> 백제 다루왕(多婁王, 재위 28~77년)조에 ‘낭자곡성(娘子谷城)’이 등장한다. ‘다루왕이 낭자곡성에 이르러 신라와 만날 것을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다루왕 시기는 삼국시대 초기로 2000년 전의 일이다. 낭자곡성은 한강 위례성에 도읍을 잡은 백제가 남방의 마한국 여러 나라를 차례로 복속하며 개척한 신경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낭자곡은 지금의 어디일까.

낭자곡에 관해서는 학설이 두개로 나뉜다. 청주의 옛 지명이 낭비성, 낭성이라는 <삼국사기>와 <여지승람>의 기록을 감안해 지금의 청주시로 비정하는 측면과 진흥왕이 순수(巡狩,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하여 악사 우륵에게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는 낭성(娘城)을 남한강변으로 해석, 충주로 생각하고 있는 견해다. 낭성은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백제 초기 강역을 가늠하는 기록이자 6세기 신라의 북진공략에 즈음, 진흥왕의 순수와 가야세력의 진출 등을 파악하는 지역적 위치이기에 그렇다.

충청북도 충주시 지역은 처음 백제의 영토였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한강으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마한의 땅이었던 경기도, 충청도 일부 지역은 우수한 철기로 무장한 백제 다루왕의 군사들에 의해 복속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군사들은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를 개척한 이후 달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조령까지 진출하지 않았을까. 그 중간에 문제의 대림산성(大林山城)이 자리 잡고 있다. 대림산성은 바로 달천을 낀 천혜의 요새로 전장 5㎞에 달하는 포고식산성이다. 포고식산성은 고구려에서 유행한 축성술이다. 초기 백제는 고구려 세력의 일부였으므로 이들이 남하한 후 이런 요새를 축조, 거점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대림산성을 연결하는 고개를 ‘낭재’ 혹은 ‘나냉이’고개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재는 고개 혹은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로 ‘낭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나냉의 ‘나(奈)’는 대명사격으로 ‘그, 저’라는 표현이며 ‘냉’이 혹은 ‘낭’이가 이름이다. 그러므로 나냉이 고개는 ‘낭고개’이며 고개와 연결된 성 이름이 ‘낭성’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향산리 일대에는 대냉이 혹은 작은 냉이라는 마을 이름도 전해지고 있다.

대림산성이 6세기 중반 진흥왕이 상주~괴산을 넘어와 중원지역을 개척할 때 순행한 낭성이라면 가장 맞아떨어지는 해석이다. 백제 다루왕이 순행하여 신라왕을 만나고 싶어 했던 낭자곡의 비밀도 풀리게 된다.

충주는 5세기 중반 백제 문주왕대 한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고구려가 차지했고 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가 충주지역을 차지하고는 국원경으로 삼아 제2부도로 정했다. 이 땅의 본래 주인이었던 백제는 신라가 가야를 흡수하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하여 충주지역을 점령한 이후에는 끝내 실지회복을 하지 못했다. 7세기 중반 고구려도 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을 전면에 내세워 충주 일대를 회복하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한강 유역에 사활을 건 신라의 강력한 저항 때문이었다. 

대림산성 석축
대림산성 석축

낭자곡·낭성의 위치 논란

조선 영조 때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낭성’을 청주로 내다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군명(郡名)에도 “상당(上黨), 낭비성(娘臂城), 서원경(西原京), 청주(靑洲), 낭성(琅城), 전절군(全節軍)”이라고 기록돼있다. 이런 연유로 낭자곡, 낭성, 낭비성을 모두 하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방 사학자들은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성대리에 소재한 낭성산성(琅城山城)을 하림궁의 고지로 추정하고(故 이원근 박사),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왕이 순수하다가 가야 악인 우륵(于勒)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였다는 낭성(娘城)으로 해석했다.

일본인 학자 말송보화(末松保和)는 자신의 논문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에서 ‘娘城は娘臂城·娘子谷の略稱づ今の淸州である’라며 낭성(娘城)과 낭자곡, 낭비성을 청주라고 했다.

그런데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이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 ‘청주를 낭자곡성(娘子谷城)과 낭비성(娘臂城)이라 한 것은 오류이며 두 성은 중원경의 고지인 지금의 충주’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 성의 위치는 상고할 수없다’고 쓰고 있다. 그는 충주 연혁을 기록하면서 ‘충주는 본래 임나국(任那國)으로, 후에 백제가 차지하면서 낭자곡성(狼子谷城), 혹은 낭자성(娘子城), 미을성(未乙省)으로 불렸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 사학자 충북대 양기석 교수도 지금의 청주 지역인 청원군 낭성면의 낭성산성으로 보는 학계의 통설을 거부하고, 두 지명은 모두 지금의 충주 지역에 해당한다며 고산자 주장을 옹호했다.

대림산성 내 유지(대궐터 등)에서 찾아진 백제, 고구려, 신라계 와편과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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