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제환공5년(BC681)에 제가 노를 이겼다. 노장공(魯莊公)은 수읍(遂邑)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했고, 제환공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양국의 군주가 가(柯)에서 회맹을 체결했다. 노장공이 서약서를 읽으려고 할 때 조말(曹沫)이 비수로 제환공을 위협하면서 빼앗은 노나라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이 승낙하자 조말은 비수를 거두고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환공이 조말을 죽이려고 했다. 관중이 반대했다.

“신의를 저버리고 죽인다면 사소한 분풀이에 불과합니다. 제후들에게 신의를 저버린 군주라는 비판을 받게 되면 천하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잃게 됩니다.”

조말은 제에게 잃은 땅을 모두 되찾았다.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제를 신뢰했다. 2년 후에 제후들이 견(甄)에 모여 환공을 패자로 추대했다. 환공23년, 산융족(山戎族)의 침략을 받은 연을 구하러 갔다가 고죽(孤竹)에서 철군했다. 연장공(燕庄公)이 전송하다가 제의 국경을 넘었다. 환공은 연장공이 지나온 땅을 연에게 주었다. 제후들은 환공을 더욱 신뢰했다. 노민공(魯湣公)의 어머니 애강(哀姜)은 제환공의 누이였다. 애강은 노의 공자 경보(慶父)와 간통해 민공을 암살하고 경보를 노의 군주로 옹립했다. 환공은 애강을 제로 소환하여 죽여 버렸다. 환공30년, 제가 초를 공격했다. 초성왕(楚成王)이 그 이유를 묻자, 관중이 대답했다.

“전에 소강공(召康公)이 제의 선조이신 태공에게 5등급의 후(侯)와 9등급의 백(伯)이 잘못을 저지르면 제가 그들을 징벌하여 주왕실을 보좌하라고 했습니다. 초가 공물인 포모(包茅)를 바치지 않으니 주왕실은 제사를 제대로 지낼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징벌하러 왔소이다.”

초성왕이 사과하자,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퇴각했다.

BC771년, 주평왕(周平王)은 수도를 하남성 낙양으로 옮겼다. 이를 계기로 각 지역에서 실력을 길러왔던 제후들이 예악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웃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는 ‘오패(五覇)’라는 실력자들이 잇달아 등장했으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제환공 소백이다. 환공이 첫 번째 패자가 되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존왕(尊王)’이라는 정치적 캐치프레이즈였다. 존왕은 주왕과 주례를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춘추시대는 예악이 붕괴되고 천자로서 주왕의 정치적 지위와 권세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제는 추락한 천자의 권위회복을 명분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패권경쟁이 시작되었다.

‘양이(攘夷)’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중원을 지킨다는 정치적 구호이다. 주왕실이 쇠약해지고 천하에 대란이 발발하자 중원의 도처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들이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지로 침투하여 중국민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도시를 자신들의 거주지로 삼기도 했다. 중원에 이민족의 세력이 확대되자 국력이 약한 제후국들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환공은 먼저 제후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고 그들과 연합하여 연을 침공한 이민족을 몰아냈으며, 위와 형을 도와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주었다. 환공의 도움으로 이들 제후국은 국토를 보전할 수가 있었다. 중국민족의 지지와 협력을 바탕으로 이민족으로부터 중국인들의 터전을 지켰기 때문에, 100년 후의 공자로부터 ‘나는 관중이 없었더라면 지금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었을 것’이라는 칭송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존왕양이’란 주왕실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현실을 인식한 환공과 관중의 패권전략이었을 뿐이다.

남북문제와 미일을 비롯한 중국과 러시아의 패권다툼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 신뢰와 실리 사이에서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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