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왕흥사지 사리장치(사진 제공: 옥천군청)
왕흥사지 사리장치(사진 제공: 옥천군청)

성왕의 전사에 대한 고기의 기록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내용은 차이가 있다. 우선 <신라본기>를 보자.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 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 狗川 ,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 聖).”

<백제본기> 성왕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이 가랑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600명을 참하고,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十五年, 秋七月, 修築 明活城. 百濟王 明 與 加良, 來攻 管山城, 軍主 角干 于德· 伊 耽知等, 逆戰失利. 新州 軍主 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 三年山郡 高于都刀, 急擊殺 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소상하게 성왕의 전사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554) 15년 12월 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신라는 명왕(明王, 성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에게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은 훌륭한 임금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훌륭한 임금을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 의자)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에 파묻었다(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머리뼈는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 한다’고 하였다).”

<일본서기>에 성왕의 전사 기록이 소상한 것은 그가 바로 일본에 불교를 전했기 때문이다. 불사에 전념한 백제 위덕왕 백제 위덕왕 시기 기록인 <주서(周書, 북주 557〜581)>를 보면 ‘백제에는 승려와 사찰이 매우 많고 도사는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에 많은 가람이 조영됐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태자 창은 아버지 성왕의 전사 후에 신하들의 간청으로 보위에 오른 후 불사에 치중했다. 본래 창은 부친의 참수에 충격을 받아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하려 했다. 그러나 백성과 신하들이 백제 사직을 지탱해야 한다고 만류하여 뜻을 굽히고 말았다. 지난 1993년도 능산리 고분군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향로(국보 제287호)’는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그리며 만든 성물로 추정된다. 이 향로에는 아버지 성왕의 비참한 죽음을 감당해내야 했던 위덕왕의 한이 담겨있다고 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 조각예술의 정화로 평가되고 있다. 향로 상단에는 도인들과 동물, 식물 등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당시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높은 예술 경지를 보여준다. 향로는 뚜껑과 몸체, 받침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의 상부에는 상상의 동물 봉황을 조각했으며 용이 힘찬 기세로 떠받고 있다. 봉황은 예부터 귀인이나 황제, 왕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봉황은 알 위에 두 발을 힘 있게 뻗고 있다. 백제가 왕도에 오부(五部)를 두고 국가를 경영한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향로의 몸체 부분에는 향이 피어오르도록 되어 있는 투공이 한 열에 5개씩 만들어져 있다. 또한 악사도 5명이며 5마리의 새가 5개의 봉우리에 앉아 봉황을 우러러보고 있다.

위덕왕은 부소산이 바라다 보이는 금강 변에 왕찰 왕흥사(王興寺)를 건립하기도 했다. 왕흥사는 부여군 규암면에 있으며 2007년 발굴된 청동 사리함에 ‘정유년(577)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명문(銘文)이 발견됐다.

왕흥사는 위덕왕이 일찍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600년 백제 법왕 때 창건됐다고 기록돼 있다. 또 법왕이 30명을 출가시켜 왕흥사 승려가 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절은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강가에 있었으므로 왕이 자주 배를 타고 들러 향화를 올리기도 했다. 발굴된 명문으로 왕흥사는 이미 위덕왕대에 창건되었음이 확인됐다.

절 앞 언덕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자온대(自溫臺)라 불린다. 왕이 왕흥사를 찾을 때 먼저 이 바위에서 절을 향해 예배하였는데,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 이 같은 이름이 생겼다는 설화가 전한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군사지명이 많은 구진벼루

성왕이 전사했다는 장소로 회자되고 있는 구진벼루는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에 있다. 옥천 읍에서 금산 추부도로로 약 20분 거리다.

이 개나루는 험준한 절벽을 연상시킬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다. 이 나루 주변에는 신라와 백제 간 치열한 다툼을 상징하듯 여러 산성들이 옹립하고 있는데 당시의 비극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말이 없다. 월전리 구천 주변 군전마을 이외에도 군대나 싸움과 관련된 지명이 온통 널려 있다. 삼양사거리 근처의 서정리에는 군대가 진을 쳤었다는 진터벌(陣基坪)이 있다. 거기서 월전리 쪽으로 조금 가면 염장(殮葬)들이 있다. 월전리 구천 바로 전에 넘는 고개는 말무덤재다. 왜 말무덤이라고 불렸을까.

‘말’의 어원은 크다는 뜻의 ‘머리’나 ‘마루’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이 고분들은 백제 장수들이 묻힌 곳일까. 또 군전마을 위쪽으로는 구산(狗山), 진(陣)말냉이, 진(陣)벌마을이 있고 서쪽에는 무중(武中)골이 있으며 앞산은 칼대쟁이(劍竿)이다.

구진벼루
구진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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