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16)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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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의친왕(義親王)을 대동단(大同團)의 총재로 추대해 상해로 망명시켜서 임정(臨政)의 구심점으로 삼아 항일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시도했으나, 이러한 거사를 앞두고 의친왕이 신의주역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돼 경성으로 압송돼 조선총독(朝鮮總督)의 별장인 녹천정(綠泉亭)에 40일동안 연금됐다가 다시 처소인 사동궁(寺洞宮)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됐다.

의친왕의 항일운동의 흔적은 1920년대에도 있었으니, 구체적으로 1921년 미국에서 조직된 대한민족대표단(大韓民族代表團)에서 11월 11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린 5대 열강회의에 대한인민건의서를 제출했는데 국내에서 서명한 372명의 명단중에서 황족대표로서 의친왕이 서명한 것은 항일의지와 관련하여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본다.

이렇게 철저히 항일의식으로 무장된 의친왕을 일제가 1930년 6월 12일부로 은퇴를 시키면서 의친왕에서 이강공(李堈公)으로 격하됐으며, 강제로 일본 규수에 머물게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1930년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그리 많이 알려진 것이 없는데 의친왕이 규슈에서 언제 귀국하였는지 모르겠으나 광복이후 6.25 전쟁 때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으며, 1955년 향년(享年) 79세를 일기(一期)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의친왕에 이어서 소개할 여성독립운동가(女性獨立運動家) 김란사(金蘭史)는 전주김씨(全州金氏) 가문의 후손으로서 1872년(고종 9) 평양에서 김병훈(金炳薰)과 이씨(李氏) 사이에 1남 1녀중 장녀로 출생했으며, 서울로 이주(移住)해 평동(平洞)에서 거주하다가 1911년 부친이 무역업에 전념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주했다.

인천에서 감리(監理)로 활동하고 있던 하상기(河相驥)와 혼인했는데 개화기의 신여성으로서 학구열(學究熱)이 대단해 당시 기혼자(旣婚者)는 입학할 수 없는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직접 찾아 갔다는 것인데 이는 하상기의 적극적인 후원이 밑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 선교사로서 여성 교육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던 스크랜톤이 정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 여성교육 기관이었으며, 1887년(고종 24) 2월 고종황제가 ‘이화학당’ 제하의 교명(校名)과 현판(懸板)을 하사(下賜)했다.

1894년(고종 32) 어느 날 밤에 김란사는 하인과 함께 이화학당(梨花學堂) 학당장으로 있던 프라이를 찾아가 하인이 가지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고는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줄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김란사의 간절한 애원에 처음에는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프라이가 깊은 감동을 받고 결국 입학을 허락하였으며 20세가 넘은 만학도(晩學徒)인 김란사가 딸과 같은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서구 학문만 배운 것이 아니었으며,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된 김란사는 세례를 받으면서 ‘낸시(NANSY)’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한자로는 란사(蘭史)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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