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주요 교통수단인 지하철. 그 노선을 따라가 보면 곳곳에 역사가 숨어있다.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역을 중심으로 주위에 퍼져있고, 한양의 시장 모습은 종로를 거닐며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지하철역은 역사의 교차로가 되고, 깊은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와 관련, 켜켜이 쌓여있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지하철 노선별로 떠나볼 수 있도록 역사 여행지를 내·외국인에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영은문’을 헐고 건립한 ‘독립문’.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알리기 위한 목소리가 모아지면서 건립하게 됐다 (출처: 문화재청)ⓒ천지일보 2019.8.19
‘영은문’을 헐고 건립한 ‘독립문’.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알리기 위한 목소리가 모아지면서 건립하게 됐다 (출처: 문화재청)ⓒ천지일보 2019.8.19

독립문, 자주독립국가 의미
명·청나라 사신 맞던 곳 헐고
서재필 주도로 모금 통해 건립
2009년 현재 위치로 이전돼

인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위치
순국한 독립투사들 기린 전시
관람객들, 평화에 감사함 느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8월은 광복의 달이다. ‘독립’ ‘평화’ ‘자주통일’ 등이 유난히 생각나는 시기다. 이럴 때 둘러봐야하는 특별한 곳이 있다. 바로 서울 서대문역 부근이다. 독립하면 일제강점기만 떠올릴 수 있으나,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와도 연관된다. 그 역사적 흔적이 담긴 서대문역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14.28m 우뚝 선 독립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로 나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석조문. 바로 ‘독립문’이다. 인근을 걷거나, 버스를 타고 주변을 돌때 한번쯤 ‘무슨 문이지?’라며궁금해 했을 수도 있다. 그럴만한 것이, 교통이 주변으로 뻥 뚫려있는 한복판에 우뚝이 서 있기 때문이다. 14.28m의 문이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다.

보통 일본과 연관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으나, 이 독립문은 명·청나라와 연관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와 친교를 갖고 사신들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건립했다. 그 근처에는 모화관이 있었다. ‘영은’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모화’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의미다.

명나라가 망한 후 청나라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한다는 여론의 목소리가 모아지자, 서재필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재필은 1986년 7월 4일 발행한 ‘독립신문’에 자신의 논평을 게재했다. 이속에는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조선이 몇 해를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의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생략)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며,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이 분명하게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

1895년부터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했고, 2년 후 완공됐다. 이후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본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됐고, 2009년 서대문 독립공원 재조성 공사 후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경 ⓒ천지일보DB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경 ⓒ천지일보DB

◆독립문 부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문 부근의 독립관을 지나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금방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애국지사의 아픈 발자취가 서려있는 곳이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후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했다. 또 형장으로 젊은 나이에 사라져갔다. 역사전시관에는 순국한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내용물이 전시돼 있다.

전시관 뒤쪽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옥사와 투옥자들이 강제로 동원해 일했던 작업장 등도 있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를 보면서 함께 슬퍼했다. 또한 독립투사들의 희생에 되찾은 오늘날의 평화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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