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세계한국어교육자협회(WATK) 수석부회장, 한글세계화운동총본부 뉴질랜드 본부장

 

더니든 시가행진(스코틀랜드풍)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더니든 시가행진(스코틀랜드풍)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뉴질랜드에는 ‘언덕 위의 성’이라 불리는 도시가 있다. 도시의 형성 과정이 높고 낮은 수많은 언덕을 배경으로 했음을 의미한다. 남섬 오타고 반도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더니든(Dunedin)이 이에 해당된다. 가늘고 길게 뻗은 오타고 반도에 형성된 더니든은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 사람들이 많다. 그런 까닭에 더니든이라는 이름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유래됐다. ‘에든버러’를 켈트어로 바꾸면 둔 에딘(Dun Edin)이기 때문이다.

더니든이 항구로서의 특성도 지니고 있기에 ‘바닷가의 작은 에든버러’로 불리기도 한다. 도로명을 보면 대부분이 에든버러에서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거나 같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에든버러에서 모방했기 때문이다.

더니든은 1848년 범선 두 척을 타고 온 344명의 스코틀랜드인들의 정착으로 이뤄졌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구릉지가 많아서 도로를 닦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도로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기복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도시의 형성이 이뤄진 후, 10년 동안 지역 간 사람들의 이동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더니든으로 명명되기 전 19세기 중반까지 도시명은 ‘뉴에든버러(New Edinburgh)’로 불렸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스코틀랜드풍의 건축물과 풍습이 많이 남아 있다. 대학 졸업식, 크리스마스 퍼레이드 등 행사가 있는 날이면 스코틀랜드식 ‘킬트(Kilt)’라는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백파이프를 불며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더니든은 괄목할 만한 도약을 하게 된다. 1861년에 오타고 지역에 있는 애로강(Arrow River)에서 사금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는 강에서 100㎞ 떨어진 더니든을 ‘보석도시’라는 이미지로 탈바꿈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전까지 더니든의 인구는 2000여명에 불과한 황량한 오지이자, 조그만 어촌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원주민인 마오리들이 낚시를 해 생선을 주요 식량자원으로 활용하며 한가로이 살았다. 하지만 인근 지역에서 금광을 발견한 이후 경제, 무역, 교육 등 모든 면에서 활기를 띠게 됐다.
 

오타고대학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오타고대학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뉴질랜드 북섬 및 유럽에서 온 사람들, 중국으로부터 대량 유입된 노동자들로 인해 1865년에는 인구가 무려 5배나 증가한 1만여 명에 이르게 됐다. 이렇듯 채금은 골드러시를 낳게 했으며 더니든을 뉴질랜드에서 일약 중심 도시로 성장케 한 요인이 됐다. 이로써 1881년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뉴질랜드 최대의 도시이자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또 교육기관도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먼저 설립돼 뉴질랜드 최초의 종합대학인 오타고대학이 1869년에 설립됐다.

더니든에는 언덕이 많은 까닭에 이색적인 도로가 있다. 특이한 점은 그 도로에서 가능한 한 차를 운전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또 언덕길이 시작되는 진입로에는 무게가 많이 나가는 차에 대한 진입을 금지하는 표시가 있다.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도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 외곽에 건설된 볼드윈 스트리트(Baldwin Street)라는 거리이다. 이 도로를 만든 사람은 1873년 윌리엄 볼드윈이었다. 그는 오타고 지역의회 의원인 동시에 신문사 ‘Otago Guardian’의 발행인이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도로명을 ‘볼드윈’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 도로는 관광객들의 증가로 차를 타는 사람에 비해 걸어 다니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 또 가파른 도로에서 매년 달리기 등 체육행사를 개최해 체력을 측정한다. 스코틀랜드 정착민들은 척박한 도시 환경을 개선하고자 무엇보다도 언덕을 깎고 도로를 건설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볼드윈 스트리트 지역에도 도로를 만들어야 했는데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그 지역이 깊은 계곡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평한 도로를 만들고자 부지런히 깊은 계곡을 메워나갔지만 한계가 있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도로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만들어진 도로는 총 길이가 350m이며 평균 경사가 20도가 된다. 가장 경사가 심한 곳은 무려 38도 정도가 된다. 수직 높이로 47.22m에 해당되니 경사가 얼마나 심한 곳인지를 짐작케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동차를 타고 올라가기에도 힘겨워 보인다. 높은 경사를 가진 도로이기에 놀이도 제한·금지돼 있다. 도로에서 공놀이를 하다가는 자칫 공이 빠른 속도로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볼드윈 스트리트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볼드윈 스트리트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뉴질랜드에서 주차의 특징은 도로 한쪽에 주차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면적은 넓고 인구가 적어서 고층아파트가 없으며 주택이 많기 때문이다. 볼드윈 스트리트의 심한 경사 때문에 무엇보다 주차된 자동차의 미끄러짐 방지를 위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특히 눈이나 비가 오는 경우 자동차 바퀴에 안전장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또 주택은 경사를 고려해 지어야 했다. 한쪽 벽의 높이를 높게 하고 반대편 벽의 높이를 낮게 했다. 이런 까닭에 집 공간을 이동할 때는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하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에 익숙해져 있기에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볼드윈 스트리트가 급경사이다 보니 오르막 또는 내리막으로 차를 운전할 때 아찔한 느낌이 들 정도다. 마력이 약한 차는 올라가기조차 힘들다. 자동차가 언덕을 제대로 올라가려면 기준 마력이 필요한데, 볼드윈 스트리트의 경우 적어도 사륜구동은 돼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는 편이 오히려 편하고 안전할 수 있다. ‘볼드윈 스트리트’에서 열리는 이색적인 축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한다. 해마다 초콜릿을 굴리는 행사가 개최되는데 참가자가 평균 1만 5000여명에 달하며, 굴리는 초콜릿 개수만 해도 7만 5000개나 된다.
 

볼드윈 스트리트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볼드윈 스트리트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언덕 위의 도시인만큼 뉴질랜드 유일의 성이 있다. 바로 라나크 성(Larnach Castle)이다. 별장이라 할 만큼 규모가 웅장하며 고풍스러운 빅토리아식 건축물이다. 라나크 성의 건축에서 시사하는 점은 장인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성의 이름을 ‘라나크’로 정한 이유와 성을 짓게 된 계기를 살펴보자. 성의 이름은 ‘윌리엄 라나크(William Larnach)’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해발고도 315m 언덕에 저택을 지었다. 성이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는 만큼 아름다운 오타고 반도, 더니든 항구의 경관을 잘 볼 수 있으며 밤에는 오로라도 잘 조망할 수 있다. 총리를 역임한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던 그는 결혼을 세 번 했으며 그 사이에 여섯 명의 자녀를 뒀다. 라나크 성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엘리자(Eliza)에게 줄 선물로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완공되기 전에 안타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래서 1886년 그의 딸 케이트에게 21번째 생일선물로 줬다고 한다. 생일선물치고는 과분한 선물이었다.

성의 구조를 보면 총 3개 층에 43개의 방을 만들었다. 규모만 웅장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저택을 짓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공사기간만 해도 1871년부터 1886년까지로 무려 15년이나 걸렸다. 성벽을 쌓는 데만 3년이 걸렸고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200명에 달했다. 성벽을 쌓은 이후 12년에 걸쳐 집을 지었다. 고용한 장인 및 사용된 건축자재도 놀라울 정도다. 욕조에 사용된 대리석은 이탈리아에서, 타일은 영국에서, 유리는 프랑스에서 옮겨 왔다. 이처럼 윌리엄 라나크는 뉴질랜드 목재는 물론,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최고급 품질의 자재를 사용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300m 높이의 고지대에 집을 짓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뉴질랜드 국내는 물론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건축자재를 성까지 옮기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주요 운송수단으로 소나 말을 이용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운송수단이 종종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소나 말의 경우 특히 겨울이 되면 이동 중에 추위에 못 이겨 주저앉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더니든’은 인구 12만 5000명에 불과하지만 뉴질랜드 남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교육인구가 도시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교육도시로 명성이 자자하다.
 

스코틀랜드 양식의 더니든 기차역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스코틀랜드 양식의 더니든 기차역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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