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세종시 백제 복국운동사(3)
[다시 쓰는 백제사] 세종시 백제 복국운동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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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운주산성
운주산성

내·외성을 갖춘 운주산성

백제 복국운동의 거점이라고 일컬어지는 운주산성은 전동면 미곡리 운주산에 위치한다. 정상부의 지형지세를 이용해 축조되었으며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졌다. 운주산성은 일명 고산산성이라 불리며 주위가 정사각형으로 네 귀에 높이 솟은 봉우리인 장대를 성벽으로 연결하여 구축했다. 성의 규모가 방대하여 전쟁 시 임시 왕도로 지켜질 만한 요새다. 수구 쪽에 새로 성벽을 수축하였으며 출입문을 만들었다. 이 출입문을 통해 이성, 작성, 금이성 등 전의면 지역의 산성과 연결된다.

성벽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축성됐는데 북벽과 동벽은 운주산 정상에서 서쪽과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이어졌으며, 남벽은 산봉우리를 에워싸면서 축조되었고 서벽은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가로지르면서 축성되었다. 따라서 북쪽은 높고 서남쪽은 낮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초 북쪽의 고구려나 신라를 겨냥하여 축조한 성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서문, 남문, 북문에서 문지(門址)가 확인되었으며 성 안에는 성문과 건물터, 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정상부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제단으로 보이는 원형 대지가 있다. 또 성 안에서는 백제 토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비암사 삼층석탑
비암사 삼층석탑

비암사 백제 추모 연면히 계승

비암사는 ‘계유명전씨아미타비상’이 발견되면서 유명해졌다. 이 비상에는 166자의 명문이 각자돼있으며 내용은 “673년 4월 15일에 국왕과 대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13년 후에 세워진 것이다.

비상 정면에는 본존으로 아미타좌상을 조각했다.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과 4존의 비구상, 2존의 금강역사상이 조각되어 있다. 양 측면 윗부분에는 각각 4존의 기락천(伎樂天)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듯한 용이 새겨져 있다. 음악을 사랑했던 백제인들의 심성을 알려주는 것으로 매우 주목되는 조각이다.

비암사는 이 유물로 미루어 백제시대 창사로 추정된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을 조성했을 당시 이 백제 토호세력의 비호로 향화(香火)가 올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찰 마당에 흩어진 와편은 이 절의 역사가 매우 오래됐음을 알려주고 있다. 백제 연회색 와편이 찾아지기 때문이다. 사전(寺典)에는 신라 말기 도선(道詵)이 중창(重創,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했다고 나온다.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전역지(全域誌)에 비암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도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극락전 앞뜰에는 높이 3m의 삼층석탑이 남아있으며, 지난 1960년 정상 부분에서 사면군상(四面群像)이 발견돼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石像)’은 국보 제106호로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과 ‘미륵보살반가석상’은 각각 보물 제367호와 제368호로 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비암사에서는 매년 백제 역대 왕과 대신 그리고 백제 복국을 위해 숨진 이들을 위로하는 ‘백제대제’가 열린다. 세종문화원과 세종시향토사연구소가 주관하는 이 행사에는 학자, 승려, 기관장, 유지, 시민들 300여 명이 참석해 백제 복국운동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비암사(사진 제공: 세종시청)
비암사(사진 제공: 세종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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