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3.1운동이었고

그들이 임시정부였다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감투정신과 희생정신 재조명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3.1운동 학술 심포지움이 지난 7일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천지일보 2019.8.15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3.1운동 학술 심포지움이 지난 7일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천지일보 2019.8.15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제74주년을 맞는 광복절이다. 자신의 목숨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또 보이지 않게 그들을 도왔던 수많았던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 그런 그들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돌아보는 심포지움이 열렸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3.1운동 학술 심포지움이 지난 7일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이정은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사장은 개회사를 통해 “오늘 학술회의를 통해 3.1운동을 이끌거나 참여하고 그 후 서로 다른 행로를 보여 역사발전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강기덕, 한위건, 배동석, 윤현진, 방순희 다섯 분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소개한다”며 “지난 100년 동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분들이 3.1운동이었고, 3.1운동 이후의 임시정부이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독립운동 자체였다. 그분들의 자유와 독립정신, 감투정신, 희생정신을 다시 조명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강기덕의 생애와 독립운동
‘3.1운동의 청년지도자들’이라는 대주제로 진행된 심포지움에서 ‘강기덕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다룬 김기승 순천향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강기덕(1886년 5월 4일 함경남도 덕원군 출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보성법률상업학교 법학과 3학년 재학 중일 때, 보성 학생 대표로서 3.1운동에 참가했다. 전문학교 학생대표단 조직에 앞장섰고, 중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독립선언서 배포와 그들의 조직적 동원 역할을 담당했다.

3.1운동으로 2년 8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강기덕은 1920년대 이후 원산 지역의 사회운동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또한 조선민중의 빈곤 문제 해결을 주요과제로 설정했던 그는 인쇄소와 언론사 지국을 경영하면서 함남기자연맹을 조직하고 함남기자대회를 주관하는 등 함남 지역의 언론운동을 지도했다.

1926년 이후 조선민흥회 결성에 참여, 신간회 원산지회와 덕원지회를 이끌면서 1930년 이후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강기덕이 꾸준히 민족운동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했기에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고, 무려 4차례의 실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는 5번에 걸쳐 투옥돼 7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그의 이러한 활동에 정부에서는 1990년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독립장을 수여했다.

한위건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위건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다룬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은 발표를 통해 3.1운동 당시 한위건은 강기적, 김원벽과 함께 학생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음을 밝혔다.

한위건은 이후 1926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의 한 사람으로, 1927년 신간회 간사로, 1928년 이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했으며, 1931년 이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1937년 중국 옌안에서 사망한 독립운동가다.

김승태 소장은 한위건에 대해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자료와 연구는 많지 않다. 더욱이 그가 1920년대 후반부터 관여했던 공산당 활동 때문에 2005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고 설명했다.

배동석의 생애와 독립운동
이정은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이 발표한 ‘배동석의 생애와 독립운동’에 따르면, 배동석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3.1운동 학생단 대표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 배동석은 3.1운동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민족대표 진영의 비밀 사자가 되어 경남 마산 지방 지도층 인사를 만나 3.1운동 참여를 설득하는 사명을 수행했다.

배동석은 10대 시절 이전 대구 계성학교를 다닐 때부터 항일 동맹시위를 벌여 일제의 고초를 치렀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늦은 나이에 세브란스연합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의사의 길을 가고자 했지만 3.1운동으로 인한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이정은 회장은 이에 대해 “만일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의사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었을 것”이라며 “서울에서 학생층의 주요 지도자로, 민족대표 진영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경남지역 인사들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키고 시위운동을 경남지역에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배동석을 기억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3.1운동 이후 서로 다른 행보
역사발전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줘

우산 윤현진의 인생역정과 독립운동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우산 윤현진의 인생역정과 독립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에 제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남다른 지혜를 발휘한 ‘아름다운 청년 윤현진’에 대해 주목했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는 환경에서 나고 자란 우산 윤현진이 받은 전통교육과 근대교육은 그가 원만한 생활자세로 일관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국채보상운동 참여는 일제의 경제적인 수탈을 체험하는 소중한 경험이자 교육현장이 됐으며, 졸업 이후 중국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지에서의 경험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특히 일본 유학을 통해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 모순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윤현진은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 등에서 활동했으며, 이를 통해 평등과 자유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임을 자각하는 동시에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서 파생했는가를 자문하는 계기가 됐다. 그가 찾은 실천적인 대안은 민족자본 육성을 통한 자립경제 수립에 있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부 차장으로 취임한 윤현진은 운영비 조달에 분골쇄신했으며, 국내에 있던 가족들의 자산을 운영비로 충당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한중 국제적인 연대를 위한 한중호조사 조직에도 여운형, 김규식, 서병호 등과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한국의 절대 독립을 염원하던 그는 안타깝게도 1921년 9월 16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방순희의 생애와 독립운동
‘방순희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다룬 이가연 동아대 외래교수는 발표를 통해 3.1운동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적극 참여했음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3.1운동을 계기로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스스로 모색하게 됐다. 그 근거로 3.1운동 이후 많은 여성들이 상하이로 건너온 것과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것,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을 들었다.

방순희는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해방 때까지 계속해서 의원직을 장시간 유지한 유일한 여성의원이다. 그는 대한독립 및 민족해방의 완성과 함께 남녀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방순희는 가족을 따라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신한촌에 정착하게 된다. 아버지 방도경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물산객주를 차리고 이주 한인들을 상대로 상품 위탁판매와 여관업 등을 운영하며 북간도 관성학교와 블라디보스토크 한민여학교에 재정을 지원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방순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인 기독교회가 운영하는 삼일여학교에 진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 정신여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정신여학교는 3.1운동 당시 서울의 3월 5일 시위에 적극 참여했으며, 3.1운동을 전후로 한 정신여학교 출신들의 독립운동도 활발했다. 그중 핵심은 김마리아가 주동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조직 활동이다.

이가연 교수는 “(기록은 없지만) 방순희 역시 당시 선배들의 활동을 보고 들으며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며 “그가 나중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재건에 적극 나서서 1943년 충칭 임시정부와 연계된 한국애국부인회를 주직하고 부주석이 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방순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임시정부 선전연락원으로 임명돼 남편과 함께 중국에 남아 선무공작을 계속하다 이듬해 4월 26일 중경에서 상하이를 거쳐 귀환동포 수송선으로 인천에 들어왔다. 1948년 한국독립당 부녀부장으로 선출돼 여성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1979년 5월 4일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대한민국정부는 1963년 방순희․김관오(광복군 출신 남편) 부부에게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이날 심포지움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않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3.1운동의 청년지도자들’에 대해 알린 자리로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는 취지에 부합하는 행사였다. 또한 각 발표에 따른 토론자(장규식 중앙대 교수, 이원규 소설가, 신규환 연세대 교수, 이명화 도산학회 회장, 이순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들의 예리한 분석과 질문 등이 돋보이는 자리였다.

이번 심포지움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겼던 수많은 ‘숨은’ 독립운동가를 생각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 이번 심포지움은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이 주최 및 주관하고 국가보훈처, 광복회, 순국선열유족회, 3.1운동기념사업회가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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