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세종시 백제 복국운동사(2)
[다시 쓰는 백제사] 세종시 백제 복국운동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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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두잉지 백제 치소 판축 토성의 유구
두잉지 백제 치소 판축 토성의 유구

두잉지 치소는 구 연기 당산

백제 ‘두나리기’ 즉 두잉지 치소(治所, 어떤 지역의 행정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로 추정되는 당산성은 세종시 연기면 연기리에 위치하며 두 내(川)가 합쳐지는 지리적 환경을 지니고 있다. 바로 미호천과 금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해발 150m의 옹립된 유적이다.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도보로 오르기엔 힘들다. 산 정상에는 테메식의 토석 혼축(混築) 성지가 발견된다. 이는 백제시대 유행했던 축성 양식으로 주변에는 다수의 백제 토기편과 와편이 산란하고 있다. 토루(土壘)는 길게 평지까지 동서로연결돼 이 성이 보민성(保民城)으로 치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필자는 이 성에서 수년 전 조선시대 연기군의 고호인 ‘전기(全岐)’명(銘) 와편을 찾은 바 있다. 두잉지가 ‘전기’라는 이름의 한자로 바뀐 것은 조선 세종대로 이를 입증하는 사료라고 하겠다. 당시 두잉지 주민들은 이 성을 중심으로 주변 평지와 산록에 마을을 조성하고 살아가지 않았을까. 백제계 다수의 회색 연질 토기편은 당산을 중심으로 인근 경작지에서 수습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과거 백제시기 금불상 2개도 출토됐다. 1개는 일본으로 반출되려다 현재 공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이 산은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연기군수 주관으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운주산성
운주산성

백제 마지막 왕도 주류성에 대한 논란

백제 마지막 왕을 의자왕이 아닌 풍왕(豊王)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면 풍왕은 누구인가. 그는 백제 제31대 의자왕과 어머니 군대부인 은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에 보면 풍왕은 631년에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아버지의 명을 받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660년 왕도 사비가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되자 백제의 귀족 복신 등과 유민들은 일본에 있는 풍왕을 불러 왕으로 추대했다. 일본 덴지(天智)천황은 5000명의 군사를 보내 풍왕을 도왔다. 초기 백제 복국운동의 기세는 왕성했다. 여러 싸움에서 신라군은 패퇴하였으며 백제는 잃었던 과거의 성을 모두 회복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당나라 대군은 이미 대륙으로 돌아 간 시기였으며 신라에서는 병사를 다시 파병해야 할 정도로 전세가 불리해졌다.

그러나 그 시기 풍왕과 복신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다. 풍왕은 굴속으로 복신을 유인하여 살해했다. 이때 신라 정병과 손인사가 이끄는 당나라군 30만 군사가 백촌강에서 백제연합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일본에서는 수천 척의 전선과 2만명 이상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백제 복국군은 여지없이 참패를 당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신라연합군은 강안에서, 일본군은 전선에서 싸웠으나 제대로 배를 상륙하지도 못하고 수장(水藏)되었다고 한다.

이 백강전투에서 백제 복국군은 완전히 패망했으며 살아남은 귀족 군사들은 서해를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있던 백제인들이 뱉은 한탄이 <일본서기>에 기록되고 있다.

“주유성(州柔城)이 비로소 당(唐)에 항복했다. 이때 나라 사람들이 ‘주유가 항복하였으니 일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어지게 되었구나.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향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풍왕도 주류성을 탈출하여 고구려로 건너갔다는 설이 있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이로써 3년 동안 처절하게 저항했던 백제 복국운동은 종식되고 말았다. 주류성(周留城)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에 등장한다. 백제 멸망 이후 3년간 기사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세종시 전의면의 운주산성(雲住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청양 자비성(慈悲城, 칠갑산), 홍성읍성(洪城邑城) 등에 비정하는 학설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 신라와의 대항이 비교적 많이 나오는 <일본서기>에는 ‘주유성(州柔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주류성이 “백강(白江)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한 땅이어서 농사지을 수도 없는 땅이다. 지금은 지켜내는 곳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백성들이 굶주리기 쉽다”고 적혀 있어 위치 추정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고 김재붕 선생은 ‘백강’을 지금의 아산만 웅천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두잉지와 두륭윤을 같은 의미로 해석, 연기 주류성설을 강조했다. 이 학설에 의거해 운주산에는 ‘백제의 얼 상징탑’이 건립되어 있으며 지금도 매년 백제전사들의 복국운동을 기리는 제향을 올라고 있다.

당산성에서 발견된 와편
당산성에서 발견된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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