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비암사(사진 제공: 세종시청)
비암사(사진 제공: 세종시청)

세종시 두잉지는 백제 마지막 왕도 주류성인가

백제 유민이 세운 비암사… 복국 의지 잔영

두잉지의 숨은 역사

지금은 고인이 된 미술사학자 황수영(전 동국대 총장) 박사는 1960년 당시 세종시(당시 연기군)전의면 비암사(碑庵寺)에서 비석처럼 생긴 불교조각품을 발견했다. 바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이란 유물이었다. 현장에서 이 유물 확인한 황 교수는 그만 굵은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너무나 감동적인 국보급 유물을 확인한 데다 그 내용이 잃어버린 백제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이란 어떤 유물이었을까. 이 유물은 현재 국보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가 멸망한 지 10여 년이 흐른 시기, 이곳에 살던 달솔 등 백제구관 전씨(全氏) 등이 힘을 모아 돌아가신 백제 왕과 부모의 명복을 추모한 징표였다. 비상에는 달솔(達率) 등 백제의 관등명이 새겨져 있었으며 조각은 백제적 요소가 강했다. 이 조각수법을 감안해 제작 시기를 계유년(673, 문무왕 13)으로 추정했다. 백제 복국운동이 있어 온 여러 성곽 가운데 무슨 연유로 이 같은 유물이 전의면 비암사에서 찾아진 것일까.

세종시는 3년간 복국운동을 벌여 온 백제잔군이 마지막으로 항거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곳을 백제 마지막 왕 풍왕(豊王)이 일본 원정군과 함께 끝까지 싸운 주류성(周留城)의 옛터로 추정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는 황 박사가 발견한 비암사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이 한몫하고 있다.

비암사에서 찾은 국보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사진 제공: 세종시청)
비암사에서 찾은 국보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사진 제공: 세종시청)

세종시(구 연기군)는 백제 땅으로 당시에는 ‘두잉지(豆仍只)’로 불렸다. 언어학자들은 두잉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두(豆)’는 관형적 용법으로 ‘두(二)’의 음독자이며 ‘잉(仍)’은 ‘내(川)’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只)’는 ‘성(城)’보다는 ‘터, 곳’을 지칭하는 접미사로서 ‘두 내가 합쳐지는 터(마을)’가 되며 ‘두나리기 혹은 두나이기’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제는 왕도 웅진(公州)을 지키는 금강의 어구인두잉지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했다. 두잉지를 잃으면 공주를 쉽게 뺏길 수 있었고 또 하나의 왕도인 부여마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백제는 일찍이 남한강 유역인 충주(국원, 娘子谷城?)까지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이곳을 잃었다. 그리고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대에는 청주마저 잃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의 세종시 영역이었다.

미호천이 동쪽을 막아주는 세종시는 금산에서 발원한 금강이 합류하여 자연적인 해자(垓字)가 되어 신라 세력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었다. 백제는 신라 세력의 진공을 차단하기 위해 이곳에 많은 성을 축조했으며 백제로서는 상당한 군사력을 집주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주변의 백제성은 운주산성, 금이성, 작성, 저산성 등 4개소나 된다. 그러나 이 주요 성들은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을 알고도 손을 쓰지 못했다. 신라군이 기습으로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공할 때 세종시 주력부대들은 그저 땅을 쳐야만 했다.

이곳의 백제 정예 군사들은 신라와 당나라에 의한 멸망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세종시, 예산, 당진, 천안, 청양, 서천, 홍성 등의 여러 성이 백제의 복국을 위해 처절한 전쟁에 돌입하게 됐다. 그 중심에 세종시, 즉 두잉지가 있었다. 백제 복국운동은 나당연합군의 부여 함락 이후 즉각적으로 시작됐다. 음력 8월 사비가 함락되자 전열을 가다듬은 백제 복국군은 이해 10월 나당연합군이 지키고 있던 부여를 다시 회복했으며, 일본에 있던 부여 풍(豊)을 모시고 와 주류성에서 백제의 사직을 이었다. 풍은 주류성에서 3년간 백제를 일으키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주류성은 고대사에서 간과하지 못할 백제 복국운동의 중심이었다.

30년 전 세종시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한 역사학자가 있었다. 지금은 작고하신 김재붕 선생이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을 졸업한 정통 향토사학자였던 그는 연기 향토사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주류성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해 온 선생은 필자에게 연기 주류성설을 강조하곤 했다. 그는 전의(全義) 운주산성과 비암사와 연기군 내 각 지명을 통해 백제 복국운동을 기록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日本書紀)>들을 예거하며 학설을 강조하곤 했었다. 이즈음 필자는 청주의 근세 마지막 성리학자인 故박윤서 옹의 저서를 영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의 논고에서도 ‘周留城 今 燕岐(주류성 금연기)’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두잉지 지역의 산성을 여러 차례 답사할 기회가 있었으며, 지금도 이 지역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과연 두잉지는 백제 복국운동의 열정과 한이 서린 마지막 왕도 주류성일까.

세종시 금강(사진 제공: 세종시청)
세종시 금강(사진 제공: 세종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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