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려 말에 우왕(禑王)이 있었다. 왕이 붕어하면 모두가 조(祖) 종(宗) 작호를 받지만 우왕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사가들은 우왕이 요승 신돈의 아들로서 왕답지 못하고 나약하였으며 결국 고려 사직을 잃게 만든 장본인으로 치부한 것이다. 지금 이 시대 어리석은 우왕의 역사가 반추되는 것은 웬일일까. 

우왕에 대한 폄하는 조선 개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위사(僞史)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왕이 포악한데다 정사라는 것을 모르고 사냥과 놀이에 빠졌던 것은 맞는다고 본다. 부친 공민왕의 후광으로 왕권 회복이 가능했으면서도 일찍이 지도력을 포기했다. 

왕은 주요 국정을 신하들에게 맡기고 가끔 보고만을 들었다. 반면에 특별히 즐긴 것은 석전희, 격구, 사냥이었다. 석전희는 단오 때 개경의 무뢰배(無賴輩)들이 좌우의 대열로 나누어서 기왓장과 조약돌을 쥐고 서로 치며, 혹은 뒤섞여 짧은 몽둥이로 승부를 결정하는 놀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간언을 하는 근신이 있으면 귀양을 보내거나 내관들을 시켜 구타까지 했다.

우왕은 또 성격이 포악하여 자신을 길러 준 유모까지 참수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조선조 반정으로 실각한 연산군의 폭력성을 방불한다. 우왕이 석전희를 구경하려 하자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이 ‘이것은 왕께서 구경하셔야 될 것이 아닙니다.’라고 간했다. 우왕은 소수(小竪.젊은 나이의 환관)를 시켜 이존성을 구타하라고 명령했다. 이존성이 도망을 가자 왕이 직접 탄환(彈丸)을 가지고 쏘았다고 한다.우왕은 미모가 있는 여인을 발견하면 남의 부인이나 대가집 처녀를 안 가리고 끌고 가 능욕했다. 그래서인지 왕비, 후궁들이 많았다. 개경의 미녀들만 보면 모두 왕의 기쁨조로 생각한 모양이다.  

고려사 신우 6년, 경신년(庚申年. 1380AD) 겨울 12월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황병사동(黃丙沙洞)에 나가 놀다가 미녀를 만나 민가(民家)로 끌고 들어가서 간음하였다. 또 밀직(密直) 이종덕(李種德)의 기첩(妓妾) 매화(梅花)를 빼앗아 길가의 인가에서 간음하였는데, 이윽고 궁중에 맞아들였다. 우가 밤낮으로 남의 딸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번번이 마구 뛰어 들어가서 탈취하였다’ 미녀만 보면 강제로 간음한 것도 연산군을 닮았다. 자신을 길러 준 할머니 명덕 태후가 운명 직전에 간곡히 당부했다. 

“고려가 대대로 전해온 지 오래되어 장차 5백 년이 되어갑니다. 대저 인군(人君)이 신료(臣僚)들의 말한 바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원하노니 왕께서는 대의(大義)를 고찰하거나 대사(大事)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여러 재상들에게 자문하도록 하고, 삼가서 감정에 부딪혀 곧바로 행하지 말도록 하소서. 또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은 사관(史官)이 반드시 기록하는 것이니,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의역)” 

그러나 우왕은 할머니의 간곡한 유훈마저 듣지 않았다. 신흥 무관세력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한 후 무기력한 24세의 우왕을 퇴위시키고 고려를 무너뜨렸다. 제왕답지 않으면 갈아치워도 된다는 맹자의 역성혁명 정당론을 내세운 것이다. 고려의 세계적 문화기운은 정체되고 유교국가 조선은 변화에 대한 수용이 늦어 여러 번 미증유의 국난을 당해야 했다. 망해가는 원(元)과 신흥 명(明)사이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강국 고려를 잘 지켰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한 국가를 책임진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고금이 같다. 나약해도 안 되고 자신이 할 일을 부하들에게 대신 토록 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부하를 처형하는 제왕적 폭군은 더욱 안 된다. 이 시대에도 우왕처럼 무책임 하거나 단말마적 폭군이 있다면 얼마나 지위를 지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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