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안성 백제 초기 유적 발굴 현장(사진 제공: 안성시청)
안성 백제 초기 유적 발굴 현장(사진 제공: 안성시청)

도기동 목책성의 형태

토성은 안성천과 잇닿은 나지막한 구릉지에 구축돼 있다. 목책은 토성 상층부에 구축돼 있으며 모두 4개 구간, 130m 정도의 길이로 확인됐다. 조사 보고서를 보면 목책성은 토루(土壘)를 쌓고 목책을 세운 구조로, 토루는 기반암 풍화토를 층이 지도록 비스듬히 깎은 후 토루 바깥 면에 깬 돌을 활용하거나, 토제(土堤)를 두고 흙다짐하여 조성하였다. 토루 바깥 외면을 수직으로 깎아낸 후 보축성벽과 유사한 보강벽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학계는 고구려식 목책성인 세종시 부강면의 남성골 산성처럼 벽면에 점토를 두텁게 바른 후 점토덩어리를 겹겹이 쌓고 불탄 흙을 다져 올려 마무리한 구조와 축조방법이 매우 흡사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초기 백제의 토성 구축과 목책의 설치는 비슷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이 목책은 백제에서 구축한 것을 후에 이 지역을 점령한 고구려, 신라에 의해 이용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백제 토기의 전형적인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세발토기(삼족기), 굽다리접시(고배), 시루 등 백제 한성도읍기의 토기를 비롯하여 뚜껑, 손잡이 달린 항아리(파수부호),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 사발(완) 등의 고구려 토기와 컵 모양의 가야계 토기도 출토되었다. 이로써 사료로만 전하는 삼국시대 책(柵)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 성안에서는 백제시대 석곽묘 4기와 토광묘 21기, 옹관묘 1기, 주구 1기, 수혈유구 1기, 매납유구 1기 등이 찾아졌다. 석곽묘에서는 다량의 소호와 단경호를 비롯해 환두대도, 과대, 철정, 철도자, 철촉, 등자, 재갈, 과대, 꺽쇠, 관정, 장경호, 심발형토기 등이 출토됐다. 아울러 총 21기의 유물이 발견된 토광묘는 묘광을 판 후 내구에 목관을 결구하는 형식으로 축조됐다.

개봉명문기와
개봉명문기와

고려 왕건 영정봉안 대찰 봉업사지

죽산면(竹山面) 죽산리(竹山里)에 소재했던 ‘봉업사(奉業寺)’는 고려 창업을 기념한 왕찰이었으며, 안성시 제일의 절터 유적으로 남아 있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태조 왕건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었으며 475년간 향화를 올렸던 기록이 있다.

현장에 남아 있는 석탑과 석조여좌상 등의 유물로 미뤄 당시에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을 중심으로 뒤편의 경작지에서는 지금도 숱한 와편이 산란하고 있다. 초창기로 추정되는 통일신라 와편과 조선 전기의 평와편이 흩어져 있다.

글마루 취재팀은 건물지로 추정되는 논두렁 기와더미에서 ‘개봉(開奉)’이라고 새겨진 고려시대 명문와편을 수습했다. 이 기와는 봉업사의 사명을 규명하는 데 있어 매우 주목되는 것으로 한때 ‘開奉’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고려시대 왕건의 진영을 모신 3대 국찰은 개경의 봉은사(奉恩寺), 논산의 개태사(開泰寺), 안성의 봉업사로 이 절터에서 수습된 와편의 ‘開奉’이란 명문이 매우 주목되는 이유는 왕건의 진영과 연관 있는 ‘개(開)’와 ‘봉(奉)’ 두 글자를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절터에 남아있는 오층석탑은 단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장식한 방형중층(方形重層)의 일반형 석탑이다. 여러 개의 판석(板石)으로 구성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이고 그 위에 기단 면석(面石)이 놓였는데, 면석은 각 면 1석씩으로 짜였으나 서쪽 면만은 2매의 판석이다. 각 면에는 양쪽에 우주형(隅柱形)이 표현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안성현 조에 “폐사되어 석탑만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어 조선의 개국과 억불숭유책에 의한 폐사로 추정되고 있다.

봉업사지 석불입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좌는 2층으로 하층은 복련좌이고 상층은 마모가 심하다. 얼굴은 도톰하며 자비가 넘치고 있다. 길게 표현된 양이(兩耳)는 어깨까지 닿고 있다. 두광과 거신광을 이룬 광배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광에는 3구의 화불이 배치되어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굽혀 흉전에 대고 왼손은 내려 옷깃을 잡고 있다. 이 유물로 보아 신라성대에도 매우 주목받았던 가람이었던 것으로 상정된다.

안성시의 성곽 유적 중 주목되는 것은 고려 국난기와 임진전쟁 당시에도 활용되었던 죽주산성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고성산 유적이 있다. 그리고 또 새롭게 발견 될지도 모르는 고대 유적들이다.

안성시 대덕면 건지리 모산리를 연결하는 야산과 구릉은 고대 유적이 발견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지니고 있다. 안성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안성천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한천의 해자로 삼았음직한 건지리 일대는 안성의 마한 목지국설과 관련해 앞으로 조사해야 할 곳이다. 글마루 취재진은 봉수터로 올라가는 내건지 뒷산에서 토성의 흔적을 찾았다. 내건지를 중심으로 모산리를 연결하는 야산의 조사가 필요함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우리 역사에서 잃어버린 마한 수장국 ‘목지국’의 실체와 백제 초기의 비밀을 캐는 단서가 반드시 안성 일대에서 찾아질 것을 기대해본다.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9호)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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