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나주 동부길코스 첫 번째 장소인 (구)금남금융조합(고조현외관). 일본인들이 고리대금 등으로 부를 축적하고 나주인들을 압박하는 최적의 장소로 사용됐다. ⓒ천지일보 2019.8.4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나주 동부길코스 첫 번째 장소인 (구)금남금융조합(고조현외관). 일본인들이 고리대금 등으로 부를 축적하고 나주인들을 압박하는 최적의 장소로 사용됐다. ⓒ천지일보 2019.8.4

나주지역탐방②

 

번화가 상징인 (구)금남금융조합

비단의 추억으로… (구)나주잠사
국도1호선 만들며 생긴 ‘금성교’
탄압의 역사 간직한 나주경찰서
나주읍성 4대문 복원된 ‘북망문’
‘향토음식전수관’ 맛과 멋 간직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무더위도 즐기고 여름방학 학생들의 역사 공부에도 안성맞춤인 곳이 있다. 바로 전남 나주 원도심 서부길·동부길이다.

나주는 과거 전라도의 대표 도시로서 전라도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국사의 전환기 때마다 결정적 기여를 해 온 곳으로 고대 마한 시대부터 현재 나주 혁신도시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수많은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특히 나주 원도심은 일제강점기 뼈아픈 근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보고(寶庫)를 간직한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지난 3월 금성관에서 시작된 서부길 (정수루~징고샅길~목사내아~서성문~나주향교)나주지역탐방①에 이어 지난 7월 31일 나주지역탐방② 동부길((구)금남금융조합~(구)나주잠사~금성교~(구)나주경찰서~전라우영터~(구)나주역~북망문)등을 돌아봤다.

서부길과 마찬가지로 동부길도 시작은 호남 최대의 객사 금성관이다. 서부길이 1시간 정도의 금성관을 향한 마실(산책)길이었다면 동부길은 2시간 정도의 영산강을 향한 이열치열(以熱治熱) 자전거길이다.

◆번화가의 상징과 비단의 추억

금성관 정문에서 자전거를 타고 곰탕의 거리를 조금만 달리면 일제강점기 일본의 전형적인 건물 상징인 빨간색 벽돌과 벽면에 유럽풍 장식이 남아있는 1층 건물이 눈에 띈다.

주민 이길남(가명, 70대)씨는 (구)금남금융조합(고조현외과)에 대해 “1907년 설립한 이곳은 일본인들이 고리대금 등으로 부를 축적하고 나주인들을 압박하는 최적의 장소였다”며 “잠사공장과 죽물주식회사가 있는 징고샅길을 들어서는 길목이자 나주 오일장의 초입부로서 당시 최고의 번화가였다”고 설명했다.

(구)금남금융조합 안내 자료에 따르면 1930년 1월 나주 오일장날 나주학생 시위대가 군중과 함께 ‘조선학생 만세’를 외쳤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또 다른 주민 김희성(가명, 60대)씨는 근처에 있는 잠사공장에 대해 “나주(羅州)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삼한시대부터 비단의 고장으로 유명했다”며 “지금은 찾기 어렵지만 누에고치를 기른 뽕나무가 곳곳에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는 군수산업(軍需産業)의 일환으로 잠업(蠶業)이 장려됐는데 1910년 일본인 센가가 최초로 나주잠사주식회사를 설립해 그 당시 전남 최고의 생산량을 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오랜 시간 일본인이 운영한 잠사공장은 6.25전쟁이 나면서 파괴되고 1954년 고(故) 김용두씨가 설립해 운영했다. 하지만 도시산업화, 화학섬유의 범람으로 퇴락해 1990년대 문을 닫았고 현재 나주나빌렐라센터로 조성돼 다양한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일제강점기인 1912년 나주천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국도 1호선을 만들면서 금성교가 세워졌다. 여러 차례 개보수로 원형은 남아있지 않지만, 최초의 가설 당시 돌다리 모습은 그대로다. ⓒ천지일보 2019.8.4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일제강점기인 1912년 나주천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국도 1호선을 만들면서 금성교가 세워졌다. 여러 차례 개보수로 원형은 남아있지 않지만, 최초의 가설 당시 돌다리 모습은 그대로다. ⓒ천지일보 2019.8.4

◆금성교와 일본탄압, 아픈 기억 간직

잠사공장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나주천이 흐른다. 나주천에는 작은 다리가 몇 있는데 이중 금성교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나주천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국도 1호선을 만들면서 건설된 전국 최초의 돌다리다. 여러 차례 개보수로 원형은 남아있지 않지만, 최초의 가설 당시 돌다리 모습은 그대로다.

주민들에 따르면 석물(石物)로 만들어진 이 다리를 통해 나주평야의 생산물이 항구로 실려가 일본으로 선적됐다.

국도 1호선 쪽을 향해 이동하니 또다시 빨간색 벽돌의 일본식 2층 건축물이 보였다.

일제 식민통치의 대표적 탄압의 상징인 나주경찰서다. 1922년에 신축된 나주경찰서는 1910년 4월에 설치돼 전남도경찰부의 통합을 받으며 산하 군내의 각 읍면의 주재소를 감독했다. 건물 정문 출입구에는 천개(天蓋)가 덮여 있어 일본인이 차를 타고 내릴 때 비에 젖지 않도록 건축돼 있다. 멀리서 보면 제법 이국적인 모습이다.

나천수(70대)씨는 “나주인에게 이곳은 한(恨)의 공간이다. 민족해방운동 투사들을 가두고 고문과 탄압이 자행된 곳”이라며 “항일운동가 이항발, 김창용, 박준삼, 박공근 등 나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한 인물들의 피가 서려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일제 식민통치의 대표적 탄압의 상징인 나주경찰서. 건물 정문 출입구에는 천개(天蓋)가 덮여 있어 일본인이 차를 타고 내릴 때 비에 젖지 않도록 건축됐다. ⓒ천지일보 2019.8.4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일제 식민통치의 대표적 탄압의 상징인 나주경찰서. 건물 정문 출입구에는 천개(天蓋)가 덮여 있어 일본인이 차를 타고 내릴 때 비에 젖지 않도록 건축됐다. ⓒ천지일보 2019.8.4

그는 “특히 나주인의 탄식과 설움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옛 전라우영터, 현재 나주초등학교 자리”라면서 경찰서 맞은편을 가리켰다.

나주초 이전에 전라우영(全 羅右營)은 영장(營將) 또는 진장(鎭將) 이라고 불렸으며 고종 32년 5월 갑오경장 후 근대적인 지방행정제도 개혁에 의해 목사(牧使)와 우영장을 없애고 나주 군수를 두고 나주관찰부를 설치해 3목 2군 7현의 병마(육군) 12개 군현의 군사를 지휘하게 했던 곳이다.

하지만 1896년 나주단발령(나주민란) 사건 후 나주관찰부는 광주로 이설하게 되고 전라남도의 행정의 중심도 광주로 이동하게 된다. 전라우영은 지금은 존치건물이 없고 주춧돌 일부는 나주 천주교회로 옮겨졌다.

이외에도 (구)나주역은 3.1운동 이후 최대항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한일 학생 간 ‘댕기 머리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구)나주역 근처엔 지역민의 삶의 애환이 담긴 (구)화남산업이 인접해 있다.

화남산업은 배고프던 시절, 일본군 식재료인 통조림공장에서 일한 나주인들이 삯으로 소의 부산물을 받아 나주 곰탕의 재료가 된 서글픈 사연이 있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학생독립운동 시발점 (구)나주역 모습. 나주역은 3.1운동 이후 최대항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한·일 학생 간 ‘댕기 머리 사건’으로 유명하다. ⓒ천지일보 2019.8.4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학생독립운동 시발점 (구)나주역 모습. 나주역은 3.1운동 이후 최대항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한·일 학생 간 ‘댕기 머리 사건’으로 유명하다. ⓒ천지일보 2019.8.4

마지막 코스는 북망문과 향토음식전수관이다. 북망문은 지난해 12월 나주 읍성 4대문 중 가장 마지막으로 복원됐다. 1920년 지역 토착민들에 의해 발간된 ‘속수나주지’라는 문헌의 기록을 통 해 성문 형식이 곡선 형태의 무지개 모양이 특징이다.

향토음식전수관은 지역민들에겐 김중민 가옥과 불로주조장으로 통한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향토음식 체험을 할 수 있다. 특히 나주·영산포 젓갈을 전통방식 그대로 담그며 장류의 원류의 명맥과 맛을 간직하고 있어 방문한 이의 입맛과 발길을 사로잡는다. 올여름 이색적인 휴가를 보내고 싶다면 일제 근대역사문화 자전거여행 코스로 나주 동부길을 추천해 본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구)화남산업은 일본군을 위한 군수용 통조림 시설로 하루 400마리의 소를 도살할 정도로 일본이 자랑하는 거대한 전시 국책사업장이었다. 나주 하면 예나 지금이나 곰탕이 유명한데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일제 말기에 주민들은 이곳에서 일하고 소의 부산물을 받았고, 그 부산물이 나주곰탕 재료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천지일보 2019.8.4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구)화남산업은 일본군을 위한 군수용 통조림 시설로 하루 400마리의 소를 도살할 정도로 일본이 자랑하는 거대한 전시 국책사업장이었다. 나주 하면 예나 지금이나 곰탕이 유명한데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일제 말기에 주민들은 이곳에서 일하고 소의 부산물을 받았고, 그 부산물이 나주곰탕 재료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천지일보 2019.8.4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나주시는 과거 고려 시대 8목 중 하나로 전라도의 중심이자 2000년 역사문화도시 나주의 위상 정립을 위해 지난 1993년 남고문 복원을 시작으로 나주읍성 4대문 복원사업을 추진해 2005년 10월 동점문, 2011년 서성문(영금문), 2018년 북망문까지 모든 복원을 마쳤다. 사진은 새천년 ‘호남의 중심’꿈꾸는 북망문 모습. ⓒ천지일보 2019.8.4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나주시는 과거 고려 시대 8목 중 하나로 전라도의 중심이자 2000년 역사문화도시 나주의 위상 정립을 위해 지난 1993년 남고문 복원을 시작으로 나주읍성 4대문 복원사업을 추진해 2005년 10월 동점문, 2011년 서성문(영금문), 2018년 북망문까지 모든 복원을 마쳤다. 사진은 새천년 ‘호남의 중심’꿈꾸는 북망문 모습. ⓒ천지일보 20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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