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수정 기자] 장재설 민족서예가가 지난달 31일 서울 종각역 근처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부친인 고(故) 장용갑 선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8.2
[천지일보=이수정 기자] 장재설 민족서예가가 지난달 31일 서울 종각역 근처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부친인 고(故) 장용갑 선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8.2

끝나지 않은 국가권력 피해

배상판결 후 또 뒤집힌 판결

[천지일보=이수정 기자] “일제에 항거하다 투옥되고, 유신정권을 비판하다 빨갱이로 몰린 아버지의 명예회복 위해 끝까지 싸울 겁니다.”

장재설 민족서예가가 지난달 31일 서울 종각역에 위치한 한 사무실에서 아버지에 대해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장재설 선생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운동을 주도했던 고(故) 장용갑 선생이다.

장씨에 따르면 올곧고 강직한 성품의 장용갑 선생은 결코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에 의해 늘 탄압 당했다. 장용갑 선생은 공업전수학교에 입학한 이후 학생운동에 눈을 뜨게 됐다.

그 발단은 1929년 광주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이었다. 광주 학생의거를 통해 일제에 크게 분개한 장 선생은 ‘피도 조선 뼈도 조선 넋도 조선’이라는 자작시를 작성해 널리 배포했다. 이를 본 왜경은 장 선생을 체포했다.
 

장재설 민족서예가 부친인 고(故) 장용갑 선생이 학생운동 했을 시절 함께했던 동료들과 찍은 사진. (제공: 장재절 민족서예가)
장재설 민족서예가 부친인 고(故) 장용갑 선생이 학생운동 했을 시절 함께했던 동료들과 찍은 사진. 중앙에 있는 사람이 장 선생. (제공: 장재절 민족서예가)

체포된 그는 일주일간 투옥해 갖은 고초를 겪고 나왔다. 장 선생이 참여한 항일운동은 이뿐만이 아니다. 1931년 만주의 중국인들이 조선인에게 행했던 만행을 강력히 규탄하는 이른바 ‘만보산사건’ 때에는 홍성공업전수학교에서 데모를 일으킨 주동자가 돼 시위를 선동하고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일주일간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독립된 나라에서도 장용갑 선생의 고초는 이어졌다. 박정희 유신정권을 비판하던 장 선생은 긴급조치 9호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잡혀 갔고, 이후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온 가족에게 붙어 다녔다. 장씨 역시 그로 인해 한전 출근 28일 만에 권고사직을 당했다.

몇 년 전 장씨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서울지방법원에서 장용갑 선생에게 긴급조치 9호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국가에 2억 8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갑작스러운 정치권의 변동으로 장용갑 선생에 대한 재판이 3년 동안 보류됐다. 항소를 했지만 고등법원에서 배상금을 10원 한 장도 안 줘도 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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