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해유민 낙사계 묘지명 탁본 사진 (사진제공: 청계천문화관)

묘비 주인 당 항복 후 귀화… 무관으로 승승장구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백제인의 묘지명으로 소개됐던 낙사계 묘비를 분석ㆍ연구한 결과 발해인으로 밝혀졌다. 발해인 묘지명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어 낙사계 묘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낙사계가 발해인이었음을 연구 발표한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은 “낙사계 묘지명은 <전당문보유(1998)> <당대묘지회편독집(2001)> 등에 소개되면서 학계에 비로소 알려졌다”고 말했다.

낙사계 묘지명은 지린성 사회과학원에서 간행하는 <동북사지(2007)> 제2호에 실린 논문을 통해 묘지명 탁본 사진과 소장처가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묘지명의 간략한 정보와 판독문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묘지석은 가로 44.5㎝ 세로 45㎝ 두께 10.5㎝로, 지문은 뒷부분 2행을 남겨두고 앞에서부터 19행 21자 총 380자이다. 그중 370자만 판독 가능한 것으로 발표됐다.

국내에 낙사계 묘지명이 소개된 것은 2007년 8월로, 김영관 관장의 <백제유민 예식진묘지 소개(2007)>에서 발해인이라고 밝혀진 바 있다. 이후 지난해 3월 권덕영 교수가 <한국고대사 관련 중국 금석문 조사 연구>를 통해 낙사계가 발해인임을 확인했다.

묘지명은 개석(蓋石, 덮는 돌)은 없고 지석(誌石, 기록된 돌)만 남아 있으며, 상태가 양호해 대부분의 글자 판독이 가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묘지명의 제목은 ‘고투항수령낙사계(故投降首領諾思計)’으로 발해 15부의 하나인 부여부 대수령을 지낸 낙사계가 항복 즉, 당에 투항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낙사계가 당에 투항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타국에 투항했기 때문에 그 인물의 이전 행적과 경력 등은 구태여 밝힐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묘지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내용을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묘주 낙사계가 투항한 인물이며, 당 황제로부터 성과 이름을 하사 받았고, 원래 부여부의 대수령이었다는 것이다.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명(名)은 노씨 성에 정빈이라는 이름으로 당대 범양 노씨 가문은 명망 높은 귀족 집안인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내용은 당에 투항 후 받은 직책과 공을 쌓으면서 부여 받은 무관직 등이다. 묘주인 낙사계는 당 투항 직후 받은 정5품하 직책에서 정4품, 정3품상 관직까지 승승장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낙사계의 명성이 해외에서도 자자했으며, 말할 때 분별력이 있고 활 솜씨도 뛰어날 뿐더러 심신이 바른 사내라는 내용의 글이다.

묘지명 마지막 부분은 사망원인과 시기, 장소 등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당 투항 후 노정빈이란 이름을 얻은 낙사계가 갑자기 병이 들어 천보 7년(748) 5월에 경조부 만년현 평강방의 마을에서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평강방은 당대 명사들이 살던 곳으로 황성의 동문 바로 앞 남쪽이며, 동시(東市, 동쪽 시장)의 서쪽 지역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묘지명에 나오는 ‘부여부 대수령’ ‘고투항수령낙사계’ 등을 통해 발해인 낙사계는 당에 투항한 후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인물이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 관장은 “묘지명 기록을 판독해 발해인임을 소개할 수는 있으나, 다각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연구 결과 발표의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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