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삼복더위가 닥치니 사람들이 수면 리듬이 깨진 탓인지 새벽 일찍 일어나 가벼운 산책에 나서거나 동네 가까이 시민공원에 나와 더위로 지친 몸을 달래기도 한다. 필자는 여느 날처럼 새벽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아있으려니 동네 사람들 몇몇이 모여 이야기를 하는데 시중 잡담이라기보다는 다소 고급스런 내용이다. 이런저런 대화 속에 어느 사람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을 했는데 돌아오는 답이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응수다.

멀찌감치 앉아 그 말을 듣노라니 재미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책과 경험 등을 통해 알고 있는 풍부한 지식은 일상생활에서 유용하다. 그래서 영국 철학가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7)이 언급한 ‘아는 것이 힘이다’는 다소 철학적 함의가 담긴 말이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아닌가. 한편 어떠한 특정 사실에 대해 적당히 넘어가 모르는 체하거나 정말 모르고 있어도 상황 전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논쟁은 정답이 없으니 그냥 해보는 소리로만 들린다.

주민 대화를 듣다말고 언제가 필자가 직장동료에게 말한 내용이 생각났다. ‘너 자신을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누가 했는가? 하는 물음인데 자신 있게 대답한 직원이 없었다. 다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알고 있지만 그 뒷말은 들은바 없다는 투다. 그래서 소크라 베이컨이 말했다고 하니까 그런 철학자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기야 소크라테스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명언을 합성해 만들었으니 이런 고차원적인(?) 말을 알기나 했을까.

그렇다 치고, 정치·경제상황이 어려운 우리현실에서, 아테네 시민을 위해 정의와 정론을 불태웠던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로 고향의 몇 년 후배가 대학 다닐 적 학기말 과제가 너무 어려워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그 당시 문학도였던 나에게 써달라고 부탁해왔다. 무슨 내용이냐 물었더니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辨明)’을 읽고 주제와 논쟁 요약을 원고지 30매로 작성해달라는 요지였다. 막상 수락해놓고 책을 보니 철학서로서 복잡하고 논쟁들이 많아 악속 지키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는커녕 타자기도 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200자 원고지에 글을 썼는데 어떤 식으로 논리를 전개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철학개론서의 부피가 상당한데다가 내용도 어려워서 한정된 원고지에 논쟁을 다 담는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일을 잊고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탐독한 바 있었으니 그 때에 알았던 내용과는 많이 달랐다. 플라톤은 그 저서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삶의 당위성에 대해 당당히 웅변했던 것인데, 정독하고 나서 필자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매료됐던 바 있다.

그 후 또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인 10여년 전에 필자는 소크라테스의 의롭고 외로웠던 행적을 소재로 해 195행에 달하는 장시를 작시해 언론지에 게재했다. 시의 제목은 플라톤의 철학서 제목과는 한자어가 다른 ‘소크라테스의 변명(變名)’이다. 철학서에는 ‘변명(辨明)’이라 사용됐으나 졸시의 제목에서는 ‘변명(變名)’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인들에 공약한 일들에 대해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름을 갈겠다’는 변론에 착상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면 가끔씩 그 시를 찾아 읽어보고 있는데 나의 시혼이 담긴 195행의 시였으니 감흥이 새롭다.

자작시 내용은 소크라테스의 이성적 사유를 쫓아 전개했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시민 대변자로서 타락한 권력에 대한 저항인바, “정치인들이 평소에는 늘 민중을 지도한다느니, 민초들의 아픔을 잘 안다느니, 잘 살게 한다느니 호언장담하면서 세상일 다 안다는 착각에 빠져 저 혼자 잘 난체 살아오면서, 민초들의 아픔을 한번이라도 그대 자신의 아픔인양 그렇게 느껴본 적 있었나요” 웅변조로 잘난 그대(정치인)들에게 호통치던 그의 기개가 퍽 매력적이었다.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실현하려 했던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마음이 이끌리는 자유를 위한 이성적인 인간의 태도를 지키며 살아왔다. 철학자의 소신을 보면서 우리 정치가나 권력자도 이성적 사유(思惟)가 이끌리는 대로 시대를 당당하게 살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봉사했으면 얼마나 좋으랴 수백번도 더 생각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시의 부제를 특이하게 단즉, ‘타락한 권력은 국민의 편한 얼굴을 가장 일그러진 모습으로 거울에 담는다’는 내용이다.

아테네 시민을 위해 정의와 정치적 소신을 당당하게 피력하며 ‘악법도 법이다’라며 죽음마저 불사했던 소크라테스이다. 우리사회에도 숱한 정치인들이 있지만 국민을 위해 그 같은 기개 있고 당당한 정치가가 있을까 아쉬움이 남는데 구태정치로 인해, 또 타락한 권력으로 국민의 편안한 얼굴을 가장 일그러진 모습으로 거울에 담는 일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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