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김덕수

기도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고 부처님이나 하느님 아니면 그 어떤 초월적 존재에게 비는 행위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재계해 정성을 드립니다. 심지어는 많은 재물을 바쳐야 더욱 감동이 돼 영험을 본다고들 부추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오직 속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을 닦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중계되는 과정에서 기도란 용어로 와전된 것 같습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기도란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요즘은 참선기도라고 하는데 정신을 맑히고 집중하는데 무엇을 따로 빌겠습니까?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바라고 빌면 자칫 과정은 소홀해지고 오로지 목적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사도(邪道)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올바른 불자라면 부처님의 뜻을 잘 받들고 그 가르침을 잘 이행하여 모두가 부처를 이루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어찌 스스로 부처되는 길에 남에게 의존하면서 빌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란 말 자체가 이치에 맞질 않습니다.

기도란 용어보다 천수경의 골자인 참회란 말이 더 적확하지 않나 싶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마음을 닦고 다스려 가다 보면 자신의 업장이 녹아나게 됩니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참회라고 이름 합니다. 기도란 말도 어원을 따져보면 고려시대 말 불교가 극도로 타락하며 퇴폐적으로 흐를 때 성행했던 것이 지금까지 유행하게 된 것 같습니다.

부처님도 사람들이 제 할 일을 다 하지 않고 기도를 드려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사도(邪道)라고 규정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는 고려말기 이후 부처님의 정법보다는 기도나 드리는 풍조가 만연한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해 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주체적 삶은 없어지고 의타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치에 부합하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소원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선복악화요 자작자수입니다. 적선하면 복을 받고 악행을 저지르면 재앙이 오는 것이요,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의 마음과 육신을 잘 다스리는 수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상을 보는 혜안이 생깁니다.

우리 옛 어른들께서는 이것을 ‘정신 차렸다’고 표현했습니다. 정신이 온전히 독립된 경지입니다. 정신이 차려지면 자기를 알기 때문에 늘 스스로를 돌아보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쯤 되면 자신이 이 세상에 왜 왔으며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명약관화하게 압니다. 그래서 목표가 명확하고 과정에 진실로 충실하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기도란 말보다 치성 드린다고 했습니다. 소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 두 손을 모아 비비는 것이 아니라 할 바를 다하고도 혹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할까봐 간절한 마음을 모아 정성스러움을 더한 것입니다. 진인사 대천명인 셈입니다.

이 얼마나 떳떳한 처사입니까? 거기에는 떳떳함이 있고 이치에 부합함이 있습니다. 먼저 달라고 빌어 보십시오. 왠지 부끄러워집니다. 참회를 제대로 해보신 불자라면 금방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요즘엔 유난히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다투듯 기도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보다 삶의 목적에 팔려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기도는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진정한 참회가 있을 따름입니다. 올바른 참회가 되면 발원한 바는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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