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ㆍ칼럼니스트  사진제공 강진군청
 

월출산(사진제공: 강진군청)
월출산(사진제공: 강진군청)

강진 땅 끝 마을서 찾은 백제의 잔영

강국 백제의 영역 여실히 증명… 청자문화로 계승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 조성 시한 올려봐야 할 듯

눈이 올 듯한 스산한 날씨, 12월 바람은 셌다. 한반도 땅 끝 마을 전남 강진 월출산. 아, 얼마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나. 하늘을 향해 옹립한 석순 같은 바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의 문턱 애잔한 억새풀이 파도를 쳤다. 유유히 흐르는 탐진강도 찬 겨울을 아는가. 그 많던 철새들도 오늘은 추위를 피해 군무의 장관을 보여주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월출산을 부처가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갑사, 무위사, 천황사 모두가 신라 고승들이 창건한 유서 깊은 가람이다. 월출산록에 자리 잡은 많은 유명 고찰은 바로 여기가 불적의 성지임을 알려 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릇, 비색 청자를 구워냈던 고려인들이 살던 강진이다. 평생 노역에 종사하던 도공들의 열정인가. 그들은 비색의 창공을 나는 군학과 짝을 이룬 원앙을 즐겨 그려 넣었다. 이들의 소박한염원이 세계적 예술로 승화된 것이다.

조선 실학의 태두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간이나 유배되어 살았다. 당대 최고의 혁신적인 지성을 이처럼 땅 끝 마을에 가둬 둔 조선은 정신적 장애자였다. 새로운 사상을 차단하고 구각을 탈피 못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매도한 편벽성이 나라의 운명을 망쳤다. 근대화에 뒤쳐진 조선은 결국 주변 강대국에 먹히고 말았다. 강진 다산 유배유적을 생각하면우선 떠오르는 것이 바로 조선 유교사회의 모순이 빚은 역사의 한(恨)이다.

아름다운 청자를 빚어냈던 강진이 다산의 귀양지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다산의 적소에는 초의선사가 다향을 심고, 명필 추사가 찾아 예혼을 불살랐다. 세 사람의 만남은 그래도 좌절의 삶속에 살아야만 했던 올바른 지성들의 한 가닥 희망이었다.

최근 강진 월출산 월남사지 발굴에서 백제 문화가 소생했다. 백제역사를 다시 써야 할, 심장이 뛰는 희소식이다. 왜 백제인들은 강진에 아름다운 가람을 조영한 것일까. 왕도에서 수백리 떨어진 땅 끝 마을에 문화를 심은 것일까. 이 백제 가람의 발굴은 강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많은 백제 문화유적이 찾아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다산초당(사진제공: 강진군청)
다산초당(사진제공: 강진군청)

아! 위대한 백제

백제는 삼국 중 불교문화가 가장 발전했던 불국정토(佛國淨土)였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으로부터 가장 앞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때문이기도 했다. 백제 불교문화는 5세기 말 성왕시대에 가장 화려하게 꽃이 핀다.

이 시기는 웅진(熊津)도읍기였으며 성왕은 왕도에 대찰 대통사(大通寺)를 창건하여 남조 양(梁)나라와의 문화 교류를 굳건히 했다. ‘대통’이란 바로 불교에 깊이 빠진 양나라 황제 무제(武帝)의 연호다. 이 시기 양나라에서는 와박사(瓦博士)와 많은 건축기술자들을 보내 가람 조영을 지도했다. 백제는 이들에게 격식을 갖춘 건축술을 배우게 된다.

이 시기 두드러진 것이 바로 남조 와당문화(瓦當文化)의 전래였다. 처음 웅진에 들여온 백제와당은 어떤 모양일까. 그것은 중국 양나라 유적에서 출토된 양나라 와당을 빼닮았다. 공주 대통사와 주변 절터에서 수습된 와당은 모두 같은 모양으로 양나라의 것과 같이 크기가 작고 연꽃은 6판이나 8판을 하고 있다. 끝은 뾰족하며 판단은 살이 찐 모습이다. 공주기 와당과 양나라 와당을 비교하면 구분이 되지 않는다.

강진 와당(사진제공: 강진군청)
강진 와당(사진제공: 강진군청)

이후 백제 건축술과 와전문화는 눈부시게 발전한다. 성왕이 공주에서 부여로 왕도를 이전한 것은 방어에 대한 부담도 있지만 비좁은 웅진이 왕도로서 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구의 증가와 건축물의 증가 그리고 일본과의 교류를 증대하기 위해서는 바다와 가까운 곳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성왕은 수도를 옮기고 국호마저 남부여(南夫餘)라고 개정한다. 이는 자신들이 북부여의 적통이며 선계가 고구려보다는 부여국임을 만방에 천명한 것이다. 이 시기 북부여 구토에 있던 많은 세력이 강해진 백제에 귀부하여 백제의 영역은 바다 건너 월주일대와 동쪽으로는 일본을 아우르는 강대한 영역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이 <구당서><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 백제는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구에 이른다. 그 나라의 왕은 동서 두 개의 성에 거주한다…”

중국사서의 기록은 백제가 중국 월주와 일본 열도까지 아우르는 해상왕국이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당나라가 제일 먼저 백제를 정벌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바로 월주를 회복하기 위한 전략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백제를 협공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하고 결국 660년 8월, 13만 대군을 파견하여 백제 사비성을 정복한다.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여 이들 나라의 은인이 되었다. 그 사은비가 부여 백마강변에 서 있다. 그런데 성왕은 국경분쟁에서 신라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참수 당했다. 성왕의 피살은 백제와 신라의 적대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고 상호보복의 악순환으로 발전하고 만다.

백제는 의자왕 때 합천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참수하게 된다. 김춘추의 백제 공벌에 대한 의지는 이 시기부터 더욱 커져 당나라를 찾아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신라군은 당나라에서 13만 대군이 덕적도에 상륙하는 것을 확인한 후 5만 대군을 출전시켰다. 5만 대군의 주력 부대는 상주 청주 보은 영동 등 백제 영역과 접했던 지역의 정예부대로 그 선두는 왕도에서 훈련을 받은 김유신 장군의 휘하 군사들이었다. 그 전위는 이들의 자제로 구성된 결사대 낭당(郎幢; 화랑과 낭도들로 구성)이라는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지금의 연산 황산벌에서 백제 결사대 5000명과 여러 번 격전을 치른 후 수도 사비로 진격했다.

사비성은 1만 명의 군사와 사비성 시민들이 지켰으나 당나라 13만 군대의 위세와 성을 넘어 오는 신라 병사들의 공격에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의자왕과 일부 왕자는 웅진으로 피신하고 궁에 남은 비빈들은 낙화암으로 올라가 꽃처럼 몸을 날렸다. 낙화암은 삼천 궁녀의 죽음이 어린 설화를 간직하여 당시 얼마나 비극적이었나를 짐작케 한다. 궁성은 불타고 도성 거리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여자들은 정복군들에 의해 난행되고 진귀한 백제 보물들은 약탈당했다.

백제 최후의 날, 그 잔영이 지금도 부여 시가지를 발굴하면 처참하게 드러난다. 이 비극적인 순간이 지금도 영·호남 간 지역감정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인가.

 

월남사지(사진제공: 강진군청)
월남사지(사진제공: 강진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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