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고대사를 기록한 <일본서기> ⓒ천지일보(뉴스천지)

광개토대왕릉비문·<일본서기> 등 기록 의문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지난해 3월,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한일역사공동위)가 한반도에 일본부(日本府)가 들어서지 않았다는 의견에 뜻을 모으고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했다. 하지만 일본은 임나일본부의 존재가 아닌 한반도 남부 지배를 부정하지 않고 있어 몇몇 한국 학자들 중심으로 임나일본부설의 표면상 폐기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중반 이후 고대에 임나, 즉 가야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일본부라는 통치기구를 세워 약 200년간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하지만 이 설을 폐기키로 동의한 일본 측의 입장은 한반도에 일본부를 세운 적은 없으나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내용에는 변함없이 지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자국의 고대사를 기록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한반도 남부 경영론’에 대한 근거를 찾고 있다.

두 사료뿐만 아니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까지 이소노 카미진구(石上神宮) 소장 칠지도 명문과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을 근거로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본은 1970~1980년대 고대사를 다시 조명하면서 스에마쓰 류의 임나 지배설이 공신력을 얻지 못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7세기 말에 등장했다는 점을 미뤄 볼 때 일본부라는 자체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임라일본부는 신라가 세운 안라(安羅)에 6세기 전반 야마토 정권의 외교사절이 존재한 것을 <일본서기>의 집필자가 ‘임나일본부’라는 글자를 갖다 붙여 통치기구처럼 묘사됐다는 인식이 통설로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일본 역사학계가 이 용어를 폐기하는 데 동의한 것이다.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후소사 교과서에는 광개토왕릉비와 비문을 소개한 뒤 ‘야마토 조정이 반도 남부의 임나라고 하는 지역에 거점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 남부 경영론은 일본 학계에서 지금까지 폐기된 적이 없다.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일본은 ‘임나일본부’가 아닌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며 “남선경영론은 메이지시대 왜에게 한국 침략의 명분이 됐다”고 해석했다.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49년(369) 왜는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벌·남가야·가야 등 가야 7국을 친 후 백제까지 서번으로 삼았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 갑진년조(404)에는 왜군이 한반도를 북상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당시 고구려군이 왜를 추격해 임나가야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 학자들은 왜가 가야와 백제를 통과해 한반도를 북상했으며, 이는 왜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측의 주장에 허구가 많다고 한국 학계는 지적한다.

김 교수는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49년조 기록은 야마토 정권이 펼친 작전이라기보다 백제의 작전”이라며 “가야 7국을 친 나라 역시 왜가 아닌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였다. 다시 말해 왜의 임나경영은 실은 백제의 임나경영”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475년 고구려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지원을 요청하러 도일했다가 일본 ‘소가’지역에 정착했다”며 “그가 바로 약 100년간 야마토 정권의 실권을 휘어잡았던 소가씨의 조상 ‘소가만지’이다”고 설명했다.

백제의 역사가 일본에 건너간 이유는 목만치의 자손들은 조상 소가만지가 원래 왜인이었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소가만지의 아버지 목라근자를 비롯한 목씨 일족들이 백제 장군으로서 수행한 임나 경영이 일본천왕의 명에 의해 이뤄진 것처럼 기록됐다는 것이 김 교수의 논리다.

일본 학계 역시 임나경영과 관련해 딜레마가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왜가 등장하지만 실제 왜는 5세기까지 돛을 단 구조선(범선)을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대규모 출병은 불가능한 것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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