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드라마 ‘이몽’ 중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과정 ‘허구’ 바로잡아야
[기고] 드라마 ‘이몽’ 중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과정 ‘허구’ 바로잡아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봉길연구소 이사장 윤주

지나친 허구는 흥밋거리로 전락하고 말아
독립 결정적 계기 ‘상해의거’ 사실대로 담아야

윤주 윤봉길연구소 이사장
 

올해는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일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가의 삶을 재조명하는 뜻 깊은 행사나 사업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방영 중인 MBC 특별기획 ‘이몽’도 1919년 있었던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일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그림자로 살다간 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자 제작됐다.

드라마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손에 자란 조선인 이영진 의사와 의열단장 김원봉이 펼치는 역사드라마로, 매회 독립운동가의 삶과 독립운동역사를 재조명하며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지난달 22일 방영된 27~30회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다뤄 시청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눈물짓게 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당시 모습이 긴박감 있게 전개됨으로써 다시금 큰 감명을 주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이날 방송에서는 역사적인 사실과 다른 허구의 장면이 등장한다. 방송에서 김원봉은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품고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야채를 팔던 윤봉길을 만나 김구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후 이영진과 김원봉은 윤봉길의 의거를 돕기 위해 계획에 착수했다. 중국의 비밀결사 청방의 보스 두월성을 찾아간 두 사람은 홍구공원 거사(윤의사 상해의거)를 언급하며 도움을 청했다. 이에 두월성은 일왕 천장절 및 상해 점령전승 기념식인 홍구공원행사 입장권을 구해줬고, 윤의사는 이를 통해 입장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사실과 전혀 다르다. 윤의사는 김원봉을 만난 적도 없고, 더구나 김원봉은 상해의거에 참여한 사실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방송에서 나온 김원봉이 상해의거에 참여했다는 내용은 작가가 꾸민 허구에 불과하다.

역사드라마는 대중에게 역사적인 사실을 알림으로써 역사의 대중화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작가의 지나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역사드라마는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며 흥밋거리로 전락시키고 만다. 이날 방송을 본 사람들, 특히 우리 청소년과 어린학생들은 이 허구를 자칫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드라마는 우리 국민들에게 본 그대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사실을 바탕으로 매우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역사드라마가 재미도 좋지만 사실을 근거로 한 제대로 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제작자나 작가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과거 인기리에 방영됐던 ‘주몽’ ‘기황후’ ‘선덕여왕’ 등의 역사드라마에서도 역사 왜곡 논란으로도 시끄러운 적이 있다. 따라서 논란을 줄이기 위해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최대한 고증작업을 거쳐 이것을 드라마에 잘 녹아들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역사드라마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이번 ‘이몽’ 드라마에서 나온 허구의 내용 중 윤의사의 상해의거 준비 과정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짚고자 한다. 윤의사는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해 임시정부와 그 주변상황을 살펴본다. 당시 임정은 겨우 이름만 유지했고, 게다가 ‘만보산 사건(1931. 7.2)’이 발생해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이 거셌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도저히 혁명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윤의사는 세계혁명사를 공부하려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유학비용을 마련하려고 모자공장에 취업해 일하면서 밤에는 상해영어학교에 다녀 영어를 공부했다.

그런데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이 발발해 세계이목이 상해로 집중됐고, 중국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됐다. 이는 윤의사에게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깨닫게 했고, 도미유학 계획을 포기하고 혁명을 결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윤의사는 당장 모자공장을 그만두고 일본인 거주지역 내에 있는 홍구시장에서 밀가루와 채소를 판매하며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며 정보 입수에 주력한다. 윤의사는 4월 24일 일본 교포신문 상해일일신문을 보고 천장절 및 상해 점령 전승기념식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윤의사는 당일 즉시 김구선생을 찾아가 거사의지를 밝히고 폭탄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미 윤의사는 모자공장에 다닐 때 이곳을 몇 번 찾아온 김구 선생과 시국문제를 토론하며 알고 있었던 사이였다.

윤의사가 상해의거를 준비할 때쯤 남화연맹의 백정기 의사도 같은 날 거사를 하려고 준비했으나 입장권을 마련해 준다는 중국인 왕아초(王亞樵)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백의사의 거사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연히 거사 당일인 4월 29일 윤의사도 입장권이 없었다. 그렇지만 입장권 없이도 윤의사는 대담하게 유창한 일본말을 구사해 홍구공원 정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폭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는 등 대성공을 거뒀다.

윤의사의 이 상해의거는 겨우 이름만 유지하던 임시정부를 소생시키는 것은 물론 중국인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당시 세계지도에 일본과 한반도(조선)는 동색(같은 색)으로 칠해져 조선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또 일본은 열강들로부터 한반도 지역(조선)을 일본의 고유영토로 승인받았다. 이로 인해 전후 조선이 독립하리라고 그 어느 나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의거에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큰 감동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말 전후처리문제를 사전협의하기 위해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기습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함으로써 해방 후 조선이 독립될 수 있었다.

많은 식민지 국가가 있었으나 유일하게 우리 조선만이 전후 즉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는 곧 윤의사 의거가 나라를 다시 찾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때문에 독립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윤의사의 상해의거 그 과정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대로 기록되어져야 하는 이유다. 역사드라마는 감명과 재미를 주는 것도 좋지만 허구가 아닌 있었던 사실 그대로 그려야만 진정한 감명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제작자와 관계자는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