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담긴 수성동 계곡과 실제 계곡 골짜기. ⓒ천지일보 2019.7.23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담긴 수성동 계곡과 실제 계곡 골짜기. ⓒ천지일보 2019.7.23

 주택가 사이의 ‘이상의 집’
 작품 혼 숨쉬는 열린 공간
 시인 윤동주도 하숙한 서촌
‘자화상’ 등이 이 시기 쓰여 
 수성동 골짜기 경치 빼어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천재 시인 이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통유리창으로 된 건물 안 책장에 꼽힌 그의 문학집은 시인 이상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교과서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이상. 잠시 여유를 부려볼까 싶어 긴 나무 테이블에 앉아 그가 남긴 서적인 ‘날개’를 한장 한장 넘겨봤다.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쓴 것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이상의 집’. 이곳은 이상이 세 살 때부터 20여 년 간 머물렀던 집터의 일부에 마련됐다. 

주택가 사이에 있어 자칫하다간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간 문학작품으로만 이상을 만나왔었는데, 왠지 모르게 이 공간을 거닐면서 글을 쓰기 위해 고뇌했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현재 이곳은 그의 작품 혼이 현대에 이어지고 꽃피워지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상의 집 ⓒ천지일보 2019.7.23
이상의 집 ⓒ천지일보 2019.7.23

◆역사 속 서촌은?

이상의 집이 자리한 서촌은 오늘날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로,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의 사이 지역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장의동(藏義洞, 壯義洞)’ 혹은 ‘장동(壯洞)’이라 불렸다. 서촌은 창덕궁 남쪽의 교동이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다.

조선시대에는 왕족과 사대부, 중인들이 거주했다. 조선 초기에는 태종 이방원, 무안대군, 세종, 효령대군, 안평대군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세자가 아니었던 왕자들이었다. 조선 중기에는 광해군이 이 지역에 인경궁과 자수궁 등 2개의 궁궐을 지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몰락으로 궁궐은 금세 사라졌다.

서인과 서인의 일파인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이 다수 거주했다. ‘서촌엔 서인이 살았다’는 서촌의 유래와도 잘 들어맞는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는 서촌과 북촌, 세종로 일대를 ‘웃대(상촌)’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문인과 예술인이 서촌에 터를 잡고 살았다. 작가 이상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외에도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시인 윤동주 등도 서촌에 살았다. 그러다보니 서촌 골목 구석구석에는 예술인의 흔적이 숨어 있었다.

대오서점 낡은 간판. 헌책방인 대오서점은 옛 물건이 가득해 관광객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천지일보 2019.7.23
대오서점 낡은 간판. 헌책방인 대오서점은 옛 물건이 가득해 관광객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천지일보 2019.7.23

◆낡은 간판의 대오서점

이상의 집에서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길 한쪽에 낡은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대오서점’이다. 낡다 못해 간판이 떨어질 정도로 보이는 이곳은 헌책방이다.

옛날에 서촌에 작은 책방을 운영하던 조대식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서촌에서 나고 자란 그는 주변의 소개로 원당에 살던 ‘권오남’이라는 여성을 만나 1951년 결혼하게 됐다. 그전까지 이름 없던 이 책방은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대오서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들이 사용하던 공간이 현재 옛 감성과 추억이 담긴 헌책방으로 변해 소개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서촌을 찾는 관광객에게 이곳은 희귀아이템을 찾을 수 있는 ‘보물창고’였다. 

대오서점 밖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만화 ‘아톰’ 인형과 서적 ‘안네의 일기’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서점 안 구석구석에는 옛 물건이 놓여있었다. 옛 추억의 물건은 그간 잊혔던 동심을 살아나도록 만들었다.

‘윤동주 하숙집 터’도 서촌에 있다. 민족 시인 윤동주는 1941년 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서촌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지금까지 사랑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바로 이 시기에 쓰였다. 아쉽게도 지금은 집 원형이 남아있진 않지만 윤동주 문학관이 근처에 있어 시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상의 집 내부  ⓒ천지일보 2019.7.23
이상의 집 내부 ⓒ천지일보 2019.7.23

◆겸재 정선도 반한 ‘수성동 계곡’

골목길을 걷다보니 저 멀리 정자하나가 보였다. 통인시장 부근에 마련된 정자. 이곳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정자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들에겐 이미 일상이었다. 저 멀리 주택가들 사이로 인왕산이 보였다.

그래서일까. 같은 서울임에도 이곳은 공기가 차분하고 깨끗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심적으로 편안해 지는 기분이었다. 산세의 정기를 받는다는 것은 이런 느낌인 듯싶다. 이곳에서 5분가량 걸어 올라가면 ‘수성동 계곡’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수성동 그림으로 등장한 곳이다. ‘수성동 그림’ 속에는 시내와 암석의 경치가 빼어났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 골짜기가 담겨 있다.

수성동 계곡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과 이야기가 얽힌 곳이다. 안평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형 수양대군에게 맞서 어린 조카 단종을 위해 목숨까지 걸며 신의를 지킨 왕자였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그는 이곳 수성동 계곡에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별장을 짓고 시와 그림을 즐겼다.

‘게으름 없이’라는 뜻의 ‘비해’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숙야비해 이사일인(夙夜匪懈 以事一人)’에서 따온 말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이 같은 수성동 계곡은 하마터면 영원히 역사 속에 잠들뻔 했다. 1971년 계곡 좌우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들어서면서 수려한 경관이 사라진 것이다.

통인시장 ⓒ천지일보 2019.7.23
통인시장 ⓒ천지일보 2019.7.23

하지만 40년이 지난 2012년 난개발의 상징인 옥인시범아파트가 철거되고 이곳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수성동계곡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됐다. 이로써 다시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인근에는 ‘세종대왕 나신 곳’이 적힌 표지석도 있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조선의 임금 중 한 명인 세종대왕. 그의 발자취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건 분명 큰 행운이었다. 이처럼 서촌 골목 곳곳에는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와 동거 동락하는 주민들의 표정은 유난히 여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서촌은 삶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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