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얼마 전 판문점에 등장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은 자신만만 그 자체였다. 마치 북한이 이제 자신의 의도대로 비핵화를 이룩하고 경제개방 정책에 나설 것 같은 착각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자신만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70년 넘게 ‘철천지원수’로 살아온 적대국가의 수장 미합중국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자신을 만나러 온다니 이를 적국의 ‘항복’으로 선전하는 호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련의 사태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벌이며 마치 80년대의 미-소 대결 때의 레이건을 숭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게 만든다. 물론 레이건은 소련의 붕괴를 촉진하고 독일의 통일을 이룩하는 인류사의 최대 기적을 창조해낸 한 시대의 영웅이었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길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70여 년, 짧게는 탈냉전 이후 3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일컫는 국제정치 용어다. 냉전 시기에는 서방 자유 진영의 리더로, 냉전 종식 이후에는 단극체제의 유일 패권국으로 미국은 세계질서를 주도해 왔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과 함께 모든 게 달라졌다. 미국이 심혈을 기울여 쌓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공든 탑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난 6월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미국이 설계하고, 시공하고, 관리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90%를 차지하는 주요 선진국 및 신흥국 정상 20명과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떠받치는 9개 국제기구의 수장들이 참석한 다자 모임이었음에도 회의장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는 미·중 무역전쟁이라는 양자 이슈였다. 폐막과 함께 G20 정상들이 채택한 공동성명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보호무역에 반대한다’는 문구가 들어가지 못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일방주의와 보호주의 노선을 노골화하고 있는 미국이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자유 진영의 패권국이 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인권·법치 등 보편적 가치, 자유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각종 제도와 규범을 통해 미국의 이익에 최적화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했다. 그것이 다른 나라들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소련의 몰락으로 미국이 전 지구적 패권국이 되면서 미국의 이미지를 본떠 만든 자유주의 질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글로벌 질서로 확장됐다. 그로부터 약 한 세대 만에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이다. 

트럼프는 집권하자마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반(反)이민 행정명령 서명, 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이란 핵협상 파기,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 유네스코 탈퇴 등 그동안 미국이 추구해온 가치와 이상에 배치되는 정책을 잇달아 쏟아내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스스로 훼손했다. 동맹 관계에도 수혜자 부담 원칙을 적용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쓸모없는(obsolete)’ 동맹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반면 권위주의 국가의 ‘스트롱맨’들과는 잘 지내고 있다. 제도를 무시한 나르시시스트적 ‘즉흥 외교’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트럼프 때문에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과연 타당한 해석일까. 미국의 무모한 민주주의 확산 시도와 극단적 세계화가 불러온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망령이 ‘트럼프 현상’을 낳는 씨앗이 되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몰락은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미소 냉전의 와중에서 전체주의라는 모순이 극도로 악화된 소련은 사라지고 독일 통일의 역사적 전환기가 찾아왔듯이 한반도에서 북한의 변화가 순리대로 찾아오기를 기대한다면 너무 성급한 바람이 아닐까. 북한은 3대 세습으로 나름대로 지배의 노하우를 축적한 단단한 체제이다. 트럼프가 정녕 북한의 변화를 바란다면 김정은 위원장보다 북한 2500만 동포를 의식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