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공신의 종말이 좋지 못한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일반 관리들도 걸핏하면 엇갈리는 상벌을 피하기는 어렵다. 청의 건륭제는 89세에 사망했으니 황제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재위기간만 61년이다. 조부 강희제에서 옹정제를 거쳐 그에 이르는 기간에 중국은 세계 최고의 번영을 자랑했다. 역사는 이 시기를 강건치제라고 부른다. 건륭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박학다식하여 지식인들을 우대하여, 인류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사고전서를 편찬했다. 2차례 준가르 평정, 회강(回疆) 원정, 금천(金川)전투, 2차례 구르카 정벌, 미얀마와 베트남 원정 등을 통해 무력도 과시했다. 또 강유를 적절히 섞어서 사회질서를 바로잡아 통치기반을 안정시켰다. 스스로 고금을 통해 제일가는 문치와 무공을 펼쳤다고 과시하며, 자신의 업적을 ‘십전무공(十全武功)’, 자신은 ‘십전노인’이라 불렀다.

건륭제는 재능과 정적이 최고로 평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강희나 옹정에 비해 훨씬 민감했으며, 자존심과 허영심도 더 강했다. 즉위 초에 관대한 정치를 펼쳤지만, 옹정의 가혹한 통치로 인한 긴장된 분위기, 관료들의 지나친 위기의식, 백성들의 불안정한 생활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무렵 건륭은 이견에 비교적 관대했다.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직간했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시책을 건의했다. 즉위 초에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재덕이나 연륜에서 나는 조부에 미치지 못한다. 누구든지 나의 잘못을 지적하라.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천도에 합당하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인정에 협조하지는 못하겠는가?”

그는 완곡하고 온화한 어투와 솔직하고 날카로운 지적으로 직언을 유도했다. 난감한 말도 잘 참았으며, 직언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도 했다. 감찰과 탄핵을 주관하던 어사들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경제, 정치, 문화의 번영으로 국가의 기틀이 안정되자,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며 직언을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태평성세에 직언은 번거로운 잔소리였다. 민감한 성격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제 직언하는 신하는 불경스러운 존재였다. 매사가 귀찮았다. 직언자에게는 구실을 찾아 반박하거나 모욕을 주기도 했다.

“내가 언로를 넓히자, 어떤 사람은 나를 시험해보려고 한다. 근래 진심으로 국가에 유익한 주장을 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명리에 연연하는 사람도 많았다. 대부분 헛된 이름과 칭찬과 승진과 녹봉에 연연했다.”

급기야 진언자를 징치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대부분은 정치적 농간으로 숨기지 않고 직언하는 사람들을 우롱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건륭5년(1740), 태상시 도정정(陶正靖)을 만나 정치적 득실을 지적하기 바라며, 내가 반성하고 수신할 수 있는 말이라면 사실대로 털어놓으라고 권유했다. 노회한 도정정은 망설였다. 건륭이 다시 한 번 대범하고 진실한 태도로 그를 격려하며 그대가 뼈대를 갖춘 신하라고 여겨 정치의 득실에 대해 자문을 구하니 사실대로 말해보라고 강요했다. 도정정은 마지못해 말했다.

“지금은 정치적 환경이 매우 좋지만,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받던 공부상서 위정진(魏廷珍 ?~1756)은 최근에 원적지로 돌아갔습니다. 그에 대한 황상의 언사는 너무 준엄하셨으니, 근본적으로 노신을 우대하시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건륭제는 기쁜 표정으로 위정진을 중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도정정은 몇 번이고 감사한 후 돌아갔다. 그러나 며칠 후, 건륭제는 조서를 내려 도정정의 진언을 반박하고, 사사로운 정으로 위정진을 변호했으니 반드시 엄격히 징치할 것이라고 질책했다. 분하고 실망한 도정정은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년 후에 울분이 겹쳐 사망했다. 위기의식은 모든 경영자에게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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