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15년 3월 상해 영국조계 서북천로 학숙에서 결성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외교부장에 성낙형(成樂馨)을 임명한 것을 비롯해 교통부장 유동열(柳東說), 재무부장 이춘일(李春日), 감독 박은식(朴殷植), 상해 지부장 신규식(申圭植), 장춘 지부장 이동휘(李東輝), 연길 지부장 이동춘(李同春), 회령 지부장 박정래(朴定來), 나남 지부장 강재후(姜載厚)를 임명했다.

이상과 같이 당(黨) 조직은 완료됐으나 당수(黨首) 결정이란 문제가 남았는데 신한혁명당의 주도세력들은 장차 동맹관계를 맺게 될 중국과 독일이 모두 군주정치를 표방하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고종황제(高宗皇帝)를 당수로 추대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관련해 신한혁명당의 주도세력들이 고종황제를 당수로 추대하고 군주정치를 표방했던 방략에서 당(黨)을 독립운동단체가 아닌 독일,중국과 동맹을 맺고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적인 성격의 단체로까지 발전시키려고 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아울러 신한혁명당의 규칙과 취지서는 박은식이 작성하고 군자금(軍資金)은 중국혁명당(中國革命黨)의 사례를 참고해 기부나 모집으로 충당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나 불가피한 경우 해적이나 강탈의 방법의 까지도 용인했다는 것을 통하여 당시 군자금 모집의 절박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신한혁명당은 성낙형의 주관 하에 중한의방조약안(中韓誼邦條約安)을 작성했는데 국내에 독립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정부의 보증 아래 중국과 한국망명정부 사이에 군사동맹을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한의방조약안을 작성한 이후 조약체결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중국 정부와 조약체결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당수이자 미래에 세워질 한국 정부의 원수로 추대될 고종황제로부터 조약체결의 전권을 위임받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와 관련해 성낙형을 비롯하여 간부들이 고종황제와 의친왕(義親王)을 해외로 망명시키려고 경성으로 파견됐는데, 고종황제는 내관 염덕신(廉德臣)을 통하여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관련자료를 전달받았으며, 그 배후에 이상설(李相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성낙형의 비밀알현(秘密謁見)을 허락했다.

그러나 고종황제를 알현하기 직전에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 김사홍(金思洪), 김승현(金勝鉉) 등 관련자들이 검거되면서 망명계획이 실패로 끝났는데 경기도 경찰부가 ‘보안법 위반 사건의 검거의 전말’ 제하의 문서로 조선총독(朝鮮總督)과 정무총감(政務摠監),군사령관(軍司令官))에게 보고할 정도로 사건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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