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문인협회 김덕권 회장.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너무 아파서 차라리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마음이 무너지면 몸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아플수록 마음을 더욱 강하게 다져야 합니다. 그것이 위기에서 자기 몸을 건져냅니다. 그런데 어디 아픔이 한 두 가지일까요? 암(癌)에 걸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고, 생활고로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악의 고난 속에서도 위대한 역사적 작품은 탄생합니다.

주문왕(周文王: BC 1152~BC 1056)은 은(殷)나라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주역(周易)’을 만들었고, 공자(孔子)는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춘추(春秋)를 썼습니다. 그리고 굴원(屈原 : BC 343?~289?)은 초나라에서 추방되자 이소경(離騷經)을 지었습니다.

좌구명(左丘明: BC 770~BC 476)은 한쪽 눈이 실명되고 나서부터 국어(國語)를 쓰기 시작했지요. 또한 손무(孫武: BC 545?~BC 470?)는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고 나서 손자병법을 완성했으며, 여불위(呂不韋: ?~BC 235)는 촉(蜀)나라로 귀양 갔기 때문에 여람(呂覽) 즉,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사마천(司馬遷 : BC 145~BC 85?) 역시 치욕스런 궁형(宮刑)을 받고 나서 위대한 사기(史記)를 완성시킬 수 있었고, 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귀양 가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 최대의 역사적 작품들은 한 결 같이 최악의 고난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고난과 역경은 신이 내린 인생 최대의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은 일 년 동안 비가 내리는 날이 열흘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평균 강수량이 해안에는 13㎜, 단층애(斷層崖) 부근은 50㎜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입니다. 새벽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고, 한낮의 미친 듯한 열기가 춤을 출 때는 섭씨 40도, 지표면의 온도는 70도까지 올라가는 죽음의 땅입니다.

수천만 년 동안 이런 급격한 온도차로 인해, 나무는 물론 바위까지 가루가 된 나미브 사막을 원주민들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엄지손톱 크기의 ‘거저리’라는 딱정벌레는 이 혹독한 나미브 사막에서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곤충은 해가 뜨기 전에 모래 밖으로 나와서 300m가량의 모래언덕 정상을 매일 올라갑니다.

작은 딱정벌레에게 300m는 사람으로 치면 에베레스트의 두 배나 되는 높이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간 거저리는 경사면의 가장 높은 끝에 다다르면,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물구나무를 서서 등을 활짝 폅니다. 이렇게 몸을 아래로 숙이고 몸을 펼치면, 등에 있는 돌기(突起)에 안개의 수증기가 조금씩 달라붙어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커진 물방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곤충의 등을 타고 흘러 내려오면 마침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악의 조건을 가진 나미브 사막에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작은 딱정벌레에게도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환경이 너무도 열악한 탓만 하고, 이만큼 했으면 최선을 다한 거라고 쉽게 포기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갖가지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경우라도, 우리는 분명히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 지혜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모든 집착을 여의면 가능한 것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살아가는데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타인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모든 중생에게 베풀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죽더라도 진리와 불보살(佛菩薩)의 곁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져 고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하면 언제까지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살아가는데 대한 그 어떤 두려움도 없게 됩니다. 그 어떤 공포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소멸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두려움을 감당할 내가 없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지요? ‘나’에 대한 집착이 없으므로 남의 도움도 칭찬도 바랄 것이 없고, 그나마 잠시 내게로 온 소유 또한 모두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 때, ‘내 것’ ‘네 것’ 하는 소유의 울타리는 사라집니다.

그리하면 비로소 이 세상 전체가 다 내 것이요, 나와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에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주만유가 나요, 이 세계가 그대로 나인데 어찌 두려움이 생길까요?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죽고 사는 내가 없습니다. 설사 우리 몸이 죽더라도 ‘나’라는 집착을 떠난 사람은 내가 불보살이기 때문에 언제나 진리의 가피(加被)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소멸시킨 사람에게 더 이상 악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가 그대로 부처요, 내가 가는 그 모든 곳이 그대로 보살의 땅이며 정토(淨土)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나’를 버린 이에게 더 이상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재색명리(財色名利)를 앞에 놓고 무심(無心)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심이란 아무런 생각과 감정이 없고. 세속적 욕망 가치판단에서 벗어난 마음의 상태를 일컫습니다. 마음이 없으니 생각도 없고, 느낌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일에 차별과 구별도 없습니다. 선함도 악함도, 좋고 싫고의 경계도 없습니다. 그저 허공처럼 텅 빈 마음입니다.

이렇게 수도인(修道人)이 구하는 바는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生死)의 원리를 알아서 생사를 초월하자는 것이며, 죄복(罪福)의 이치를 알아서 죄 복을 임의(任意)로 하자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 최고의 고난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착을 여의고 마음의 자유를 얻어 고난과 고통쯤은 벗어나면 어떨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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