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지솔 기자] 김재화 개그 방송작가가 지난달 18일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수십 년간 수많은 활동으로 개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의 이름 뒤에는 대한민국 현대 개그의 원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천지일보 2019.7.2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김재화 개그 방송작가가 지난달 18일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수십 년간 수많은 활동으로 개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의 이름 뒤에는 대한민국 현대 개그의 원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천지일보 2019.7.2

김재화 현대 개그 원조 방송작가
“수많은 좌절에도 유머 포기 못해”
어릴때부터 남달랐던 글쓰기 실력
지적센스 보이는 필력으로 픽업돼
타고난 ‘말솜씨’로 50여권 책 집필
TV 코미디 프로그램 200여편 제작
최근에도 말과 글에 대한 도서 출판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말과 글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개그 방송작가 김재화. 오늘도 그의 말과 글은 날개를 달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때로는 힘이 되고 사랑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행복을 준다.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단 한 번도 유머를 놓지 않았던 김재화 개그 방송작가의 인생을 직접 듣기 위해 그를 만나봤다.

김 작가는 언론학박사이자 개그 방송작가다. 그는 개그 방송작가 1세대로서 ‘유머 1번지’, ‘웃으면 복이 와요’ 등 TV 코미디 200여편을 집필했다. 또 50여권에 이르는 책을 집필했다. 이처럼 수십 년간 수많은 활동으로 개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의 이름 뒤에는 대한민국 현대 개그의 원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는 방송작가를 꿈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글쓰기와 책 읽기가 지금의 김재화를 있게 한 것이라고 김 작가는 설명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선생님이 저에게 국어 시간마다 책 읽기를 시키셨어요. 집에 가서도 개다리소반을 갖다 놓고 책을 읽었죠. 퇴근 후 아버지는 제가 책 읽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 책을 덮고 외워보라고도 시키셨어요. 무뚝뚝하기만 하셨던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버지가 오시기 전 책을 20~30번씩 읽어댔죠.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휘는 물론 창의성도 길러지고, 비교적 빨리 재능을 키워 나갔던 것 같아요.”

이처럼 그의 글쓰기 실력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어느 날 초등학교 방학을 맞아 동시(童詩) 한편을 써오라는 숙제가 내려졌다. 개학날이 되자 30여명의 학생은 결국 써오지 못했고, 10명은 베껴서 왔다. 또 다른 10명은 형이나 아버지가 대신 써준 동시였고, 나머지 10명은 본인이 써왔지만 어쭙잖은 동시를 써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꼬마 김재화는 어떤 동시를 써왔을까? 그는 단 한 편의 동시도 못 쓴 친구들과는 달리 무려 30편의 동시를 써갔다. 이를 본 선생님들의 눈은 휘둥그레졌으며, 학교 교무실은 난리가 났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비유를 잘했던 것 같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다 방송작가가 뭔지도 몰랐던 그는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느 한 신임 피디의 픽업으로 방송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대학 방송사에서 아나운서를 했을 무렵, 어떤 젊은 피디가 대학 방송국과 신문사를 돌아다니면서 재밌는 얘기를 잘하거나 재밌게 글 쓰는 사람 어디 없냐며 수소문을 하고 다녔어요.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픽업돼서 1974년 ‘살짜기웃어예’라는 프로그램으로 개그 방송작가로 데뷔하게 됐죠. 그때 ‘개그’라는 말이 처음 나왔어요. 당시 괴성을 지른다던가 우스꽝스러운 분장, 아니면 넘어지는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탈피해 지적 센스가 보이는 개그를 하게 된 거죠.”

그러나 그의 개그 방송작가의 길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감 떨어진 작가와 혼자 사시는 할머니의 공통점을 아세요? 두 사람 다 영감이 없습니다(웃음). 그런 것처럼 예술분야는 시대에 맞게 빠르게 변화합니다. 뒤떨어지지 않고 발맞춰가야 하는데 감이 못 따라가고 정체되면 어떻게 될까요? ‘재미가 없다’, ‘옛날거다’ 이런 식의 평가를 받는 것이죠. 개그 방송작가로서 정말 끔찍한 일 아니겠습니까?”

김 작가의 유머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았을 때 그래서 감동과 재미를 주지 못했을 때 그는 작가로서 매우 심한 자괴감과 회의감이 동시에 들었다고 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도 밀려와 다른 일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다른 일은 선택하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그의 행복이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만드는 좋은 도구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도태되지 않으려고 아플 때도,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 빈소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개그를 짰다고 했다. 추락사를 당해 허리를 심하게 다쳐 오랜 기간 병실에 누워있을 때도 아픈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글을 써댔다. 척추 장애로 인해 평생 휠체어를 타야한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도 그는 수많은 좌절 속에서 개그물을 써내려갔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현재 김 작가는 건강을 회복하고 최근에는 ‘재치있는 말솜씨를 지니거나 분별력 있는 침묵을 지키거나’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말과 글에 대한 김재화의 생각이 담겼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됐다. 어른들이 조언이라 한답시고 하는 충고가 잔소리로 전락해 달갑지 않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작가는 67세의 나이에도 소위 말하는 이른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젊은 사람과 소통하며 어울리려고 노력한다. 신선함을 항상 추구하고,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한때 피어싱도 하고 다녔어요. 제 나이 또래 사람들은 기겁할 노릇이었죠.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젊은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싱그러운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이에요. 나이 든 사람들과는 다르게 젊은 사람들은 포기할까 봐 움츠러들지 않아요. 주저하지 않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끊임없이 도전하죠. 오히려 열심히 사는 친구들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웃음). ‘안궁’ ‘안물’ ‘낄낄빠빠’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아세요? 다른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만, 저는 나이를 뱉습니다.”

김 작가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마디하고 싶다고 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라고 합니다. 억지로 웃는 웃음도 좋습니다. 웃을 일이 없다고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영원히 못 웃고 맙니다. 자 따라 해 보세요. 하하하!”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