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요즘 들어 정치인들이 ‘의회민주주의’란 말을 부쩍 많이 들고 나온다. 그 용어의 쓰임이 마치 약방의 감초와 같다. 그들이 처한 입장을 대중에게 호소하거나 정치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할 요량이겠지만 용어 쓰임의 적합성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회민주주의의 축제로 이어지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의회민주주의의 사망’ 또는 ‘의회민주주의에 조종(弔鐘) 울렸다’는 등 부정적 의미가 많이 담겨져 있어 듣기도 거북하고 정치인 그들이 자초한 결과였으니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개 야당에서 사용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의회민주주의를 다시한번 떠올리면서 ‘의회민주주의’의 실체적 정의(定義)는 과연 무엇이며, 또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의구심을 가져본다. 의회는 국민의 공선(公選)에 의해 뽑힌 의원들이 합의체기구를 구성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입법권을 실현하며, 다수결에 의해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이다. 그 기관에서 민주주의에 입각해 운영하는 것인바, 여기에서 ‘민주주의’라 함은 합의제 기관인 의회가 토론과 타협에 의해 의사를 결정하면서 간혹 다른 의견이 생겨도 토론에 의해 조정하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다수결 원칙에 따르면서 소수의 합리적 다양성도 존중해 줘야한다.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인이 판단할 때에는 실존하는 민의의 대변자로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야 하지만 소속정당과 자기이익이 우선되는 꼴이니 의회민주주의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러한 실정임에도 정치인들은 의정 사안에 대해 토론과 타협, 다수결 원칙 등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을 망각한 채 편하게 들먹이며, 유리한대로 해석하는 등 병폐를 낳고 있으니 이것이 지금 우리국회와 정당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작태라 할 것이다.

식물국회, 동물국회로 비난 받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가까스로 6월 임시국회가 열렸지만 아직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은데다가 길목 요소요소마다 시한폭탄들이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문제는 여야 공히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민의의 대변보다는 자기당에 유리하도록 하는 꼼수 책략에 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6월 국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돼 산적한 현안들이 해소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여당의 특위 카드로 인한 공조 와해다.

지난주 민주당이 한국당을 의정 단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꺼내든 특위 카드로 인해 정의당 등 소수3야당이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다. 양 특위 위원장 자리를 원내 1,2당인 민주당과 한국당이 맡기로 정했던바, 이로 인해 자칫하면 소수3야당이 여당과 공조 처리하려던 선거제도와 사법제도 개혁 합의사항까지 물 건너갈 처지에 놓이게 됐다. 민주당에서는 그간에 잘 처리해온 정개특위의 심상정 위원장을 한국당과의 짝짜꿍 합의에 의해 강제 퇴출될 상태나 마찬가지니 상황이 급박했어도 심 위원장한테는 사전에 이야기해야 정치 도리가 맞는 게 아닌가.

정개특위와 사개특위의 위원장을 민주당과 한국당에서 맡아한다면 소3야당의 우려는 크다. 민주당이 사개특위를 맡을 경우 한국당이 정개특위를 맡게 되는바,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정개특위에서 심상정 위원장이 선저제도 개혁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채택 등 골격이 한국당 위원장에 의해 변질될 가능성이 있어 즉각 반발에 나선 것이다. 가뜩이나 한국당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거부해왔고, 비례대표제 폐지를 당론으로 정해 선거제도 개혁을 거슬러왔으니 내년 총선에서 유리한 국면을 꾀하려던 바른미래당 등 소3야당의 반발은 당연하게 보인다.

의회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다수결의 원칙이다. 원내교섭단체가 합의했다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여당이 소3야당과 합의해 정개특위, 사개특위를 원만하게 이끈다는 공조 약속을 해놓고 권위와 신뢰에 어긋나게 한국당과 손을 잡고 다수결의 원칙을 당리당략적으로 이용한 것은 문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소수자의 합당하고도 진정성 있는 의견을 봉쇄한데서 정의당이 뿔이 나고 ‘배신의 정치’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1년 가까이 정개특위 위원장을 맡아 혼신의 정열을 바쳐온 심 의원의 심정은 어떨까.

“민주당이 불신임 직전까지 갔던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심상정 퇴출로 되살려놨다” 이 말은 정개특위 위원장직에서 강제해고(?) 당한 심상정 의원의 말이다.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합의해 추진해왔던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된 정개특위 위원장의 교체 등 원내 주요사안의 변경에는 기존 (여야 4당)합의안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협의돼야함은 정치의 기본이자 신뢰요,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여당이 기존 합의안을 폐지 위기로 내몰았으니 심 의원이 거대 양당의 술수에 의해 훼손당한 의회민주주의 기능성을 지적함은 일리가 있다. 이쯤 되면 정치권이 툭하면 들고 나오는 ‘의회민주주의의 사망’은 소수당보다는 거대양당의 횡포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짝짜꿍 꼼수 정치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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