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현재 서울시 중구 소공로에 위치한 웨스틴조선호텔은 원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발상지(發祥地)라 할 수 있는 원구단(圓丘壇)이 있었던 유서 깊은 성지(聖地)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구단이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13년에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이듬해인 1914년 9월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이 건립됐다.

필자가 원구단의 역사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2009년 11월부터인데,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본 칼럼의 주제인 석고각(石鼓閣)의 존재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원구단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당시 동쪽영역에 석고각이 건립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필자와 석고각의 그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다.

본래 석고각은 원구단 동쪽영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석고단(石鼓壇) 구역에 조성됐던 건축물(建築物)인데 구체적으로 고종황제(高宗皇帝) 즉위(卽位) 40주년을 기념해 조성된 석고(1909년 완성)를 안치한 건축물로서 1902년 착공해 1903년(광무 7) 윤5월에 완공된 것인데, 무엇보다도 그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석고각을 추적했다.

1923년 석고단 구역에 조선총독부도서관(朝鮮總督府圖書館)이 건립되면서 석고단의 정문이었던 광선문(光宣門)이 조선총독부도서관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27년 6월 남산의 일본식 사찰(寺刹)인 동본원사(東本願寺)의 정문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립 이후 석고각의 모습(사진제공:박관우 역사작가)  ⓒ천지일보 2019.6.30
1923년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립 이후 석고각의 모습(사진제공:박관우 역사작가) ⓒ천지일보 2019.7.1

그 이후 석고각은 1935년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추모하는 사찰이었던 박문사(博文寺)의 종각(鐘閣)으로 이전(移轉)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매일신보(每日申報) 1935년 3월 23일자 기사에 석고각을 국보적(國寶的) 조선(朝鮮) 대표(代表) 건축물(建築物)의 하나라고 평한 것을 통해 볼 때 만약에 현재까지 존재하였다면 국보 문화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석고각이 당시에 박문사의 종각으로 전락됐던 것이다.

이러한 석고각이 박문사로 이전되면서 석고각에 안치되어 있던 석고는 결국 현재의 위치인 웨스틴조선호텔 구역에 있는 황궁우 옆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니 고종황제 권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석고나 석고각이 이렇게 초라하게 변모한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심정 금할 수가 없다.

원래 석고는 석고각안에 눕혀서 안치(安置)됐던 것인데, 현재의 석고는 그런 보호막이 하나도 없이 눕혀 있는 모습이 아니라 서있는 모습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고각에 중대고비가 있었으니 광복이후인 1945년 11월 23일 박문사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인데 참으로 천만다행(千萬多幸)으로 석고각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3년 후가 되는 1958년 이승만(李承晩) 전(前) 대통령(大統領)이 영빈관(迎賓館) 부지 선정을 위하여 장충단(獎忠壇) 박문사터를 시찰(視察)할 때 석고각이 그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는 모습과 더불어 1960년 2월 장충단에서 민주당 시국강연회(時局講演會)를 개최하는 사진에 석고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1960년 2월 이후의 석고각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조사했으나 발견하지 못하여 결국 석고각에 대한 조사는 중단했다.

필자가 석고각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지만 뿐만 아니라 석고각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보는 순간 그 웅장한 규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마치 원구단의 축소판(縮小版)을 대하는 듯한 강렬한 영감(靈感)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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