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지방의 농업고등학교를 나와 세무 공무원으로 일했던 정태수는 점쟁이 말을 잘 들었다. 마침 일하기 싫은 판에 점쟁이가 “어차피 국세청장 해 먹기는 글렀으니 사업을 하라”고 하자, 세무서를 때려치우고 사업을 시작했다. 점쟁이가 “땅을 파 먹고 살 팔자”라고 하자 폐광을 사들였는데 이게 대박이 났다. 아파트를 짓고 건설업을 해서 또 큰돈을 벌었다. 점쟁이가 “쇳가루를 만져야 큰돈을 번다”고 하자 이번에는 철강 사업을 했다. 또 대박이 났다.

가난한 사람들 집 지어 살게 해주려고 했던 수서 땅을 상업지구로 바꾸어 또 돈을 벌었고 이 과정에서 정치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엄청 했다. 친구 잘 만나 대통령까지 해 먹었다는 소리를 들었던 군인 출신의 노아무개도 돈을 먹었고, 신망 받던 야당 대표도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대통령의 아들도 돈을 받아먹었다. 정치판에 힘깨나 쓴다는 인간들 치고 이 돈 안 받아 먹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돈을 사과상자에 담아 전달한 것도 이 사람이 최초다.

재계 14위였던 한보가 부도를 내면서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멀쩡한 기업들이 쓰러졌다. 직장생활 잘 하던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장사 잘 하던 사람들이 빚쟁이가 되어 시름에 빠졌다. IMF가 그렇게 온 것이다. 사람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IMF라는 걸 처음 알았고, 나라 경제가 그렇게 한방에 훅 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무서운 일이었다.

IMF가 올 때만 해도 우리 경제가 나쁘지 않았다. 거시경제도 좋았고 국민들 살림살이도 나날이 풍성해지고 있었다.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들이 세상에 눈을 떴고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였다. 먹고 살만해지면서 놀러 갈 일도 많아졌고 음악도 영화도 풍성했다. 나이트클럽들이 밤새 불을 밝혔다. 그러다 IMF라는 엄청난 재앙을 맞은 것이다.

나라 경제를 거덜 내고 국민들 삶을 피폐케 했음에도 그는 당당했다. 청문회에 나와서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가 무슨 잘못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신의 기업에서 일하는 경영인들을 머슴이라 하였다. 돈에 관해서는 주인인 자신이 알지 머슴들이 어떻게 알겠느냐, 하여 국민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재벌 갑질의 원조다.

재판에 나올 때도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다. 얼굴에는 커다란 마스크를 하고 휠체어에 앉아 환자 시늉을 했다. 나 아픈 사람이니 건드리지 마, 하는 표정이었다. 법정에 휠체어 타고 나타난 것도 이 사람이 최초다. 이게 무슨 좋은 본이 되었는지, 그 뒤로 휠체어 타고 재판 받으러 나오는 인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휠체어로 환자 코스프레를 하더니 병을 치료해야 한다며 외국으로 나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20년도 더 됐다. 그 뒤로 국민들도 잊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외국으로 도피한 아들이 최근 붙잡혀 들어왔다. 그 아들의 이름을 보니, 한보그룹의 이름도 아들들 이름에서 따 왔지 싶다. 그와 두 아들이 나라에 내야 할 세금이 삼 천억이 넘는다고 한다. 아들은 그가 죽었다고 한다. 죽었다면, 체납한 세금도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 액수도 대한민국 1등이라고 한다. 꼭 살아 돌아와, 밀린 세금 좀 내주었으면 좋겠다. 별로 착하지도 않은 사람이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처음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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