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후주세종(後周世宗)
[고전 속 정치이야기] 후주세종(後周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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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오대시기 후주 세종 시영(柴榮 921~959)은 하북 형대의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집안이 중도에 몰락해 곽위(郭威)에게 시집간 고모를 찾아갔다. 시영은 곽위를 도와 각종 사무를 잘 처리하여 사랑을 받다가 양자가 되었다. 당시 곽위의 집안은 부유하지 않았다. 시영은 살림을 돕기 위해 차를 팔면서 강릉까지 오가면서 기사와 무예를 익히며 역사와 황로학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후한에서 추밀부사가 된 곽위를 따라 종군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곽위가 후주를 세우자 황자의 신분으로 개봉을 지켰다. 954년, 곽위가 사망한 후 황제로 즉위했다. 패기만만한 시영은 곽위의 유언에 따라 대사업을 전개했다. 간의대부 왕박(王朴)에게 자신이 몇 년 더 살 것인지 물었다. 왕박이 30년 후의 일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시영은 10년 동안 천하를 개척하고, 10년 동안 백성을 기르고, 10년 동안 태평을 이룰 것이니 족하다고 말했다. 위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시영은 5년의 통치기간에 전력을 다해 개혁을 추진하며 남정북벌에 나서 분열을 마무리하고 통일천하의 서막을 열었다.

시영이 훗날 송을 건국한 조광윤에게 명하여 편성한 금위군은 주변국을 위협하는 강군으로 성장했다. 나중에 조광윤은 이 군대를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직접 진사의 시부, 논문, 책문을 열람했다. 귀족을 특채하는 제도는 과감히 폐지하고 출신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불교를 탄압하여 3만 336개의 사찰을 폐지하고, 6만 1200명의 승려를 환속시켰다. 유명한 화산도사 진단(陳摶)을 산으로 돌려보냈다. 대역죄인을 제외한 모든 죄수를 석방했다.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자신의 음식을 반으로 줄였다. 혁신적인 조세개혁인 균전제도 그가 처음 시행했다. 그러나 959년에 북방에서 성장하던 거란을 북벌하다가 병에 걸려 돌아왔다가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나중에 조광윤이 그의 아들 시영훈을 몰아내고 송을 건국했다.

시영은 암흑기에 한 줄기 빛을 발한 오대시기 제1의 명군이었다. 6년의 재위기간에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각 방면에서 그가 위한 개혁은 대단했다.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인 그는 20명의 한림학사에게 ‘군주의 어려움과 신하의 쉽지 않음(爲君難爲臣不易論)’ ‘변경의 평화대책(平邊策)’을 짓게 했다. 이러한 명제로 여러 신하들에게 치국에 대한 대책을 물은 것은 역사상 보기가 드물었다. 건의서를 신중히 검토한 그는 왕박의 ‘평변책’ 가운데 ‘선이후난(先易後難)’을 흔쾌히 받아들여 통일대계를 제정하고 실천했다. 시영이 39세에 사망하자, 어떤 사람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저주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과로가 치명적인 원인이었다.

그는 전대의 누구보다 뛰어났고, 후대의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치적을 남겼다. 복잡한 형세를 극복한 북송은 20년의 노력을 기울여 통일을 완성했다. 조광윤의 영명한 결단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했던 것은 그가 후주의 강력한 국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영용한 젊은 군주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더 일찍 통일을 실현했을 것이고, 연운16주도 수복했을 것이다. 쿠데타로 후주정권을 탈취한 조광윤은 시영의 통일과정과 경제문화의 발전을 이은 것에 불과했다. 송이 상업을 중시하고, 문인을 우대한 정책은 상인출신으로 근면했던 시영과 무관하지 않다. 시영의 종교문제를 처리한 책략과 상업도시를 발전시킨 것은 중국이 상업문명과 시민문화로 가는 길잡이가 되었다. 시영은 5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문치와 무공으로 중당 이래 200년 동안 계속되었던 할거현상을 마무리한 군주였다. 유능한 군주에게 5년은 부족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역사의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은 무시한다. 대략을 지녔던 일대의 영주 주세종 시영은 준비만 하고 결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결과는 조광윤의 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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