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의 문화 찔러보기] 스포츠와 국위선양
[전경우의 문화 찔러보기] 스포츠와 국위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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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최초로 TV 방송이 도입됐다. 독일 시내 곳곳에 TV가 설치돼 경기결과가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이는 올림픽이 세계적인 스포츠 제전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기록영화가 만들어졌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여성 감독이 카메라 8대와 약 2 백 명의 기술진, 4만 미터의 필름을 들여 ‘민족의 제전’ ‘올림피아’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후에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까지 수상했다.

올림픽 성화가 선보인 것도 베를린 올림픽 때다. 대회 조직위원장이었던 킬 디엠의 아이디어였는데, 1936년 7월 20일 낮 12시 그리스 올림피아 성지 유적지에서 15명의 성녀(聖女)들에 의해 점화되어 한 소년의 손으로 넘겨졌다. 그로부터 이틀에 걸쳐 약 3천 명의 주자들이 번갈아 가며 베를린의 메인 스타디움을 향해 달렸다. 올림픽의 성화 봉송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당시 성화는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베를린에 들어왔다.

성화가 통과하는 베를린 시내에는 빠짐없이 나치스를 상징하는 갈고리십자, 하켄그로이츠가 내걸렸고, 성화대도 하켄그로이츠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TV중계를 통해 독일은 물론 전 세계로 방송되었다. 나치 정권이 치밀하게 계산하여 이뤄낸 이 성화 이벤트는 나치 독일의 힘을 과시하고 독일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가난한 식민지의 청년 손기정은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 금메달 시상식에 올라야 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도 멕시코 정권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독재정권이라며 비난을 받았던 멕시코 정부는 산소가 희박하여 올림픽을 치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올림픽을 유치하였다. 국민들은 올림픽 개최에 반대했다. 나라 경제도 좋지 않고 먹고 살기가 힘든 판에 무슨 올림픽이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결국 시위로 260명이 죽고 천명 넘는 시민이 부상하는 재앙을 겪고 겨우 올림픽을 치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온 올림픽이다. 북한은 백 여 명의 선수단을 내보내 금과 은 각 1개, 동메달 3개를 따냈다. 한국은 은메달 하나였다. 초라한 성적으로 기가 죽은 한국 선수단과 달리 북한은 기세가 등등했다. 사격에서 금메달을 딴 이호준은 기자회견에서 “적의 가슴을 쏘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한국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한일전보다 남북대결이 더 큰 이슈였다. 남북한 선수들이 국제대회에서 맞붙으며 목숨을 걸고 싸웠다.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들도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았다. 경기에 진 북한 선수들은 아오지 탄광에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북한을 이기고 돌아온 선수들은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 영광을 얻었다.

스포츠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우리도 스포츠가 국위선양이란 이름으로 박수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메달을 따면 국위선양을 한 것이고 그것은 곧 국가를 위한 일이니 군 복무를 면제해주는 게 맞다고 여긴 것이다. 이제는 국위선양이라는 말도 촌스러운 시대다. 메달 땄다고 덮어놓고 군 면제 이야기부터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낡은 생각, 묵은 제도는 손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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