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단사표음(簞食瓢飮)
[고전 속 정치이야기] 단사표음(簞食瓢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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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숙손무숙은 걸핏하면 남의 잘못을 들추어냈다. 그가 가르침을 청하자, 안회(顔回)는 공자의 경고를 인용하여 충고했다. ‘군자는 자기의 잘못은 따지지만, 남의 잘못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예기 단군하에 나오는 말이다.

안회는 누구나 인정하는 공자의 수제자로 일찍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사용한 교재는 시, 서, 역, 예, 악, 춘추 등이다. 특히 역에 대한 연구가 깊어서 약관의 나이에 공자와 역을 논했다. 공자를 따라 10년 이상 열국을 주유하고 노로 돌아온 안회는 스승을 도와 고전을 정리했다. 특히 역은 안회가 중요한 정리자 가운데 하나였다. 정리과정에서 안회는 과로로 사망했다. 안회가 죽은 후, 공자는 그가 정리한 역을 기초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고생을 겪은 후 후세에 완전한 역경을 남겼다.

한비자 현학에서는 공자 사후에 유가는 8개 학파로 분리되었다. 그 가운데 안회를 따른 사람들을 안씨지유(顔氏之儒)라고 한다. 안회는 덕을 가장 중시했다. 좌전 양공24년 조항에 따르면, 군자로서 가장 큰 것은 덕을 세우는 것(立德)이고, 그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立功)이고, 그 다음은 말을 세우는 것(立言)이다. 영원히 버릴 수 없는 것을 불후(不朽)라고 한다. 안회의 불후는 입덕이었다. 후세에 그를 복성(復聖)이라고 불렀는데, 또 하나의 성인이라는 뜻으로 공자의 복제라는 뜻이다. 안회의 덕은 인이 핵심이다. 그는 공자의 인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안회의 고상한 도덕적 인격은 후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회의 언행은 천지조화의 재현이다. 그는 객관적 규율을 존중하고, 자연에 순응했다. 그러나 인간의 능동성도 중시하여 도를 지키며 뜻을 바꾸지 않았다. 재상이 되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장점을 뽐내지 않고, 백성들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 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스스로 몰러나 시기를 기다린다. 등용되면 실천하고, 그렇지 않으면 숨어서 살아도 좋았기 때문에 누항에 살면서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도 즐거워하며 자신을 자연스럽게 지켜냈다. 장자 대종사에서 그를 동우대도(同于大道)라고 한 것은 자아와 행동이 객관적 규율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사물은 극에 이르러 반대로 돌아간다.

노정공이 안회에게 물었다.

“동야자(東野子)가 수레를 잘 몬다는 말은 들었지요?”

“훌륭하지만 그의 말이 도망칠 것입니다.”

불쾌했던 정공이 측근들에게 군자도 남을 모함한다고 비웃었다. 사흘 후 말을 관장하는 관리가 보고했다.

“동야필의 말이 도망쳤습니다.”

장공이 곧바로 순자를 불러서 어떻게 그것을 알았느냐고 물었다. 안회가 대답했다.

“정치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옛날 순(舜)은 백성들을 잘 부렸고, 조보(造父)는 말을 매우 잘 부렸습니다. 순은 백성들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았고, 조보는 말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순의 백성은 도망치지 않았고, 조보의 말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동야필이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으면 재갈과 말의 몸이 일치되고 훈련한대로 속도가 났습니다. 그러나 험난한 곳을 지나왔다면 말의 힘이 다 빠졌을 것인데도 여전히 말에게 똑바로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소?”

“궁지에 몰리면 새는 부리로 쪼고, 짐승은 발로 할퀴며,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예로부터 백성들을 궁지로 몰아넣고도 위험하지 않았던 군주는 없습니다.”

안회는 공자가 창립한 유가학설을 배우고 알리는 과정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게다가 단사표음하는 어려운 생활이 그의 건강을 해쳤다. 마흔의 나이에 그가 죽자 공자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했다. 사람들의 언행이 너무 거칠다. 새가 부리로 쪼고, 짐승이 발로 할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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