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이쯤 되면 지긋지긋하다 못해 혐오스럽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날만 새면 싸움질에 막말과 궤변이 넘쳐난다. 바로 우리 정치판 얘기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정치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과잉 비평이 아니다. 세간에 흐르는 국민의 감정은 아마 이 보다 더 할 것이다. ‘국회해산’이 가능하다면 벌써 몇 번이나 더 했을 것이며, 국회의원 소환이 가능하다면 아마 소환에 나서는 사람들로 줄을 섰을 것이다. 지금의 정치상황은 비극이 아니라 거의 ‘재앙’ 수준이다.

우리 국회법을 보면 2월·4월·6월 1일과 8월 16일에 임시회를 집회한다고 적시돼 있다(제5조의 2 ②항1). 그리고 임시회 등 국회 운영을 위해서는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협의’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대로 한다면 지금이라도 6월 임시국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관건은 제1야당이 빠진 임시국회가 과연 ‘실효성’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 때문에 자유한국당과의 지루한 국회정상화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민주주의 발전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이중적 담론이 곧 ‘증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악의 근원이 결국 소수 독재자들(oligarques)의 게걸스런 탐욕에 있음을 고발한다. 거기서부터 자본과 권력, 지식과 제도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능욕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프랑스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한국의 그것보다는 좀 앞서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더 심화되고 확산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도 이제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서 더 심해지고 있는 듯하다. 혹여 랑시에르가 들으면 이에 반발하면서 그래서 당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그 대열에 섰느냐고 따질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한국 민주주의는 지지고 볶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는다. 아직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지체와 후퇴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칫 ‘파국’을 자초하지는 않을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탄핵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긴 하지만 사실상 한 시대를 끝내는 거대한 ‘혁명적 변화’를 의미했다.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부패하고도 무능한 권력을 국민의 힘으로 끌어 내렸다는 점은 그 자체가 한국 민주주의의 힘이고 생명력이었다. 말 그대로 구태로 범벅된 ‘앙시앙 레짐’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길 바랐다. 따라서 ‘전혀 새로운 대한민국’을 꿈 꾼 것은 결코 유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도 벌써 집권 3년차에 반환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 새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물론 남북관계가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여전히 높다. 그럼에도 권력행태와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은 도긴개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사회적 갈등은 더 심화되고 다툼은 일상화되고 있으며 국민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있다. 게다가 정치는 ‘막장정치’ 딱 그것이다. 그렇다면 한파가 몰아치던 그 광화문 광장에서 무엇을 위해 촛불을 들었는지를 이제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혹여 그 촛불마저 소수 독재자들의 게걸스런 탐욕에 빼앗긴 것은 아닌지를 반문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툭하면 반대만 외치며 민생국회마저 발목을 잡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더 논할 필요가 없다.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달면서 발목을 잡은 지 벌써 몇 달째다. 지지율 같은 소리도 할 필요조차 없다. 내년 총선에서 어떻게 될지 지켜보면 될 일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청와대와 민주당의 모습이다. 국정에 대한 확신은커녕 불신만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정치는 작동을 멈췄고 경제는 숨소리마저 가쁘다. 골목마다 쏟아지는 민초의 비명 소리는 우리 모두에게 비수처럼 다가온다. 이러다가 100여년 전의 비극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정말 걱정이다. 그럼에도 모두 네 탓이다. 더욱이 이 와중에도 내년 총선을 대비해서 발빠르게 움직이는 민주당 안팎의 행태를 보노라면 추웠던 그 겨울에 들었던 촛불마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우리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단 말인가.

“아버지, 스스로를 믿으세요. 저는 아버지의 활 앞에서 겁먹지 않아요.”

오스트리아 총독 게슬러(H.Gessler)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윌리엄 텔(W.Tell)은 아들의 머리위에 사과를 맞혀야 하는 선택을 받게 된다. 아무리 활을 잘 쏜다지만 자칫 자신의 활로 아들을 죽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는 혹여 일이 잘 못되면 게슬러를 죽이겠다는 결심으로 화살 한 개를 더 준비했던 터였다. 다행히 아버지의 화살이 사과를 명중시킴으로써 두 번째 화살은 꺼낼 필요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스위스 독립운동을 소재로 작품을 쓴 쉴러(F.Schiller)는 사실상 윌리엄 텔의 두 번째 화살에 더 의미 있는 스토리를 남겼다. 그 두 번째 화살 때문에 스위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고 결국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화살이 실패하면 다음은 네 차례다. 그것이 두 번째 화살을 예비한 윌리엄 텔, 아니 스위스 민중의 의도였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윌리엄 텔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도 촛불혁명으로 화살 한 개는 성공시켰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윌리엄 텔도 두 번째 화살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부디 그 두 번째 화살이 문재인 정부를 타깃으로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