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만들어진 궁과 달리 백제에 건축된 궐의 지붕은 일직선으로 놓였다. (사진제공: 백제문화단지)

일본 아스카 시대 건축에 영향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역사는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 중심의 기록으로 이뤄지기 쉽다.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 있는 역사 기록도 신라에 비해 없지만 그렇다고 마지막으로 기술된 ‘의자왕과 삼천궁녀’만으로 백제를 설명할 수 없다.

최근 백제 문화에 대한 조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금동대향로를 보더라도 알 수 있듯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며 한류의 원조를 이끌고 온 나라, 바로 백제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이야기를 꺼내 그 위상을 살피는 자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을 정도로 백제에 대한 관심이 크다.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으나 동북아 중심세력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문화강국으로 서서히 인정받고 있다. 지금부터 약 2030년 전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년간 지속됐으며 한강, 금강, 영산강과 경기, 충청, 호남지역의 넓고 비옥한 농경지를 지니고 있었다.

백제는 주변국가와 뱃길로 교류할 수 있는 서해바다를 통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내보였다. 동북아 문명교류의 중심지이자 해상왕국으로도 위상을 높였다. 이러한 지역 특성은 백제가 문화적인 개방성과 포용성, 국제성과 진취성을 지닌 동아시아 문명교류의 다리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일본에 남방의 앵무새를 비롯해 무령왕릉 출토품인 태국에서 만든 구슬 무티사라, 백제금동대향로에 조각된 동남아시아산 코끼리 등 다양한 유물과 기록으로 백제가 해상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해상을 이용해 백제는 일본에 각종 문화를 전파하면서 첫 한류를 이끌어 냈다. 백제 문화가 일본 아스카 문화의 근간이라고 불릴 정도다. 백제인 아직기가 일본 태자의 스승으로 역임하고 백제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면서 백제와 일본의 교류는 활발해졌다.

특히 아스카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백제의 건축 기술이다. 아스카 시대(6~7세기)에 세워진 비조사(飛鳥寺, 아스카지), 사천왕사(四天王寺) 등 대부분의 일본 불사건축에서 백제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전성기 때 나당 연합군에 패한 백제는 일반적으로 국력이 기울어져 패망한 국가들과 다르다. 현재 부여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잡힌 후에도 백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는 백제가 패망했으나 결코 얕잡아 볼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말이 전설처럼 나돌고 있으나 사실 이와는 다르다. 학계에서는 의자왕이 당나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주적인 왕으로 다시 조명하고 있다. 또한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목숨을 내놓는 계백 장군과 같은 이들이 있었으니 백제가 무른 약소국이었다는 그릇된 역사 인식을 바꿔야 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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