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평론] 호국보훈의 달, 미발굴 독립운동가를 떠올리다
[아침평론] 호국보훈의 달, 미발굴 독립운동가를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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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라곤 논설실장/시인 

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달이다. 6일 현충일에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추념식을 올리며 호국을 위해 순국하신 영령들을 기리고 그 후손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추모해야할 보훈의 달에 뜻하지 않게, 현충일 정부기념식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김원봉’ 건이 여론의 물살을 타면서 보수·진보 양측의 논리가 갈라진 채 이념 대립으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김원봉(1898~1958)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항일운동에 앞장선 인물로 광복군에 합류해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면서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다. 그 후 광복을 맞자 월북해 북한 고위직을 지내면서 한국전쟁 때 김일성 정권의 전쟁 지휘부 역할을 잘 수행한 공로로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에 북한 정권이 수여한 노력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활동으로 인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면서 어정쩡한 상태로 있었던바,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 대통령이 김원봉을 두고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며 그가 합류한 광복군 대원들의 군사적 역량이 오늘날 우리국군의 뿌리였다고 밝힌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김원봉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광복절 날에 독립운동가로서 김원봉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영화 ‘암살’을 관람한 뒤에 김원봉을 찬양한바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에 “이제는 남북 간의 체제 경쟁이 끝났으니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더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고 페이스북에 적었을 만큼 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김원봉의 공적에 대해 찬사를 보냈던 일이 있다.

그런 까닭에 한국당 등 야당에서는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에 대한 과오를 지적함 없이 독립운동가로서의 공로를 밝힌 것은 김원봉 서훈을 위한 분위기 조성용이라 인식하면서 이 정부와 진보 민간단체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등에 대한 서훈 주기 작전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야당이 크게 반발하자 청와대는 이번 대통령의 언급과 서훈 추서와는 ‘별개의 문제’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면서 “서훈 문제는 보훈처가 할 부분”이라고 말한 상태다.

사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서훈은 보훈처 소관이지만 국가보훈처장이 대통령의 의중을 거슬리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피우진 보훈처장이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한 언급이 그것이다. 피 처장은 “지금 현재 기준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관련 건에 대해 의견 수렴 중이며 가능성은 있다고 밝혔는바, 비록 김원봉이 한국전쟁에서 북한지휘부를 도왔던 인물이나 그전에 독립운동가로서의 혁혁한 공과를 제대로 따지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인물로 단서를 달았지만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포상할 수 있도록 지난해 독립유공자 선정기준을 개정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심사 기준이 엄격하기로 소문나, 미발굴 독립운동가 후손으로부터 원망을 많이 듣고 있는 보훈처가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들에 대해서도 포상할 수 있도록 독립운동가 선정 기준을 개정하면서까지 적극성을 보이는데 대해 말들이 많다. 보훈처가 독립운동가 등 수훈자에게 응당 그에 맞는 포상과 대우를 해야 마땅하겠지만 그간 보훈 당국이 소극적 자세를 보이면서 신청자에게 소명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등 이유로 거부한 사례가 어디 한두 건인가.

보훈의 달에 정치권을 후끈 달구고 있는 ‘김원봉 수훈’ 논쟁을 보면서 필자는 보훈처의 높은 벽에 막힌 미발굴 독립운동가 후손 정병기(62)씨의 사연이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인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에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증조부 정용선 선생이 1916년 자취를 감추었고 그 후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경성형무소(서울 마포구 소재)는 독립 운동가를 체포해 온갖 고문을 했던 악명 높기로 유명했던 곳인데, 옛 터 형무소자리에 “1912년 일제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적힌 표석 문구만 봐도 그 잔학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증조부의 독립운동 활동과 관련해 42년째 보훈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정씨는 증조부 옥사 기록이 담긴 제정호적과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진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된 증거”라고 했다. 하지만 보훈처에서는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간단한 답변뿐이다. 더군다나 지난 80년 12월, 정부가 보관하던 일제강점기 형무소 수형인 기록문서가 관리 실수로 소각된 상태에서도 신청인에게만 자료 입증을 요구하는 보훈처가 사회주의자 서훈에는 적극적이다. 보훈의 달에 미발굴 독립 운동가를 떠올리면서 그 후손의 애타는 심정을 헤아리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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