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1983년 여름도 무척 더웠다. 그해 2월에는 북한의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남쪽으로 날아왔고 이 때문에 온 나라에 공습경보가 울려 퍼져 사람들이 전쟁이 난 줄 알고 놀라 자빠질 번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지구 반대편 멕시코에서 한국이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에 올랐던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소식에 온 국민들이 이게 웬일이냐며 신바람을 내었다. 전파상 앞에는 TV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하였고, 뉴스가 시작되면 바로 그 사람이 등장한다 하여 땡전 뉴스라 불렀던 시절이었다. 이상한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즐거워할 만한 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1982년에 프로 야구가 생겨나고, 그 다음해에 씨름이 전국에 생중계되는 국민 스포츠로 거듭났다.

1983년 이만기가 초대 민속씨름 우승을 하면서 천하장사 시대를 이끌었다. 지금 아이들은 저 사람이 개그맨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하겠지만, 아득한 그 시절 그는 모래판을 주름잡던 최고 스포츠 스타였다. ‘인간 기중기’ 이봉걸도, ‘모래판의 신사’ 이준기도 이만기 앞에서는 체면을 구기기 일쑤였다.

축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983년은 대한축구협회가 정한 ‘한국축구 재건의 해’였다. 그 전 해에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이란에 0:1, 일본에 1:2로 져 예선 탈락하는 바람에 한국 축구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터져 나올 때였다. 1983년 2월 프로축구리그 ‘슈퍼리그’가 그래서 출범된 것이다. 골을 넣을 때마다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하는 이영무가 속한 할렐루야와 유공이 유일한 프로팀이었고, 여기에 실업팀 4개를 더해 프로 아닌 프로리그를 운영했다.

때마침 <애마부인>을 비롯해 <산딸기>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끈한 영화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나왔고, 덕분에 사람들은 앞 다퉈 극장으로 몰려갔다. 학생들은 교복을 벗어던지고 형이나 아버지의 옷을 입고 극장으로 향했고, 도끼처럼 생긴 빗을 뒷주머니에 꽂고 팔자걸음으로 거리를 배회했다. 이상한 시절이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던 이상한 시절이었다. 야구장에서는 아재들이 소주를 퍼마시고 주정을 하거나 소주병을 그라운드로 던지기도 했다.

지금은 우리 축구가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지만 그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와 붙어도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TV 중계가 어려웠던 시절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늘 비장했다. 수중전에 강한 말레이시아 팀이 일부러 물을 뿌려 운동장이 물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멀리 쿠알라룸푸르에서 전해 왔던 것이다.

그런 시절에, 세상 처음 세계대회 4강에 들었으니 그것을 신화라 부를 만했던 것이다. 대통령이 중계를 보다가 국제전화를 돌려 작전지시까지 했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그럼에도 그것을 영광이라 여겼던, 참으로 이상한 세월이었지만, 그럼에도 국민들은 멀리 나가 싸워 이긴 선수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청춘들이 희망과 위안이었다.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장하다, 대한민국 청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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