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여포의 고자질로 사공 장온이 순식간에 당 아래로 끌려가 목이 달아나자 동탁은 아무 걱정 말라며 백관들을 달랬다. 그 광경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사도 왕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해 지팡이를 끌고 후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근심에 쌓였는데 모란정 쪽에서 홀연히 한숨과 탄식 소리가 들려 왔다.

왕윤은 의심이 버쩍 났다. 발걸음을 죽여 정자 쪽으로 가만히 가서 엿보니 탄식을 하고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기(歌妓) 초선이었다.

초선은 어려서부터 왕윤의 집으로 들어와서 노래와 춤을 배웠다. 나이는 이팔이요, 자색과 기예가 절묘했다. 왕윤은 친딸처럼 귀여워했다.

왕윤이 다시 귀를 기울여 들으니 초선은 여전히 한숨을 쉬고 있었다. 왕윤은 한동안 듣고 있다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천한 계집이 무슨 까닭으로 긴 한숨 찌른 탄식을 하느냐?”

그 소리에 초선은 깜짝 놀랐다. 얼른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천첩이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이 있겠습니까.”

“네가 사정이 없다면 밤이 깊은데 어찌해 이곳에서 탄식을 하고 있느냐?” 왕윤은 큰소리로 다시 초선을 꾸짖었다.

초선은 옷깃을 여미고 고요히 대답했다. 그녀의 명주같이 예쁘고 맑은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어리었다. “대감께옵서 소녀에게 말씀 아뢰는 일을 허락해 주시면 소녀는 감히 폐부를 헤쳐 아뢰겠나이다.”

“숨길 것 없이 사실대로 말해 보아라.”

말하는 왕윤의 얼굴빛이 엄숙해 보였다.

“천첩이 대감의 은혜를 입사와 기르시고, 가르치시고, 가무를 배우게 하시고서 항상 너그럽게 대해 주시니 비록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다 해도 대감의 은혜는 만분의 일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 사이 뵈오니 대감께서는 양미간에 수심이 구름 어리듯 어리셨습니다. 그러하오나 제 어찌 감히 여쭈어 볼 도리가 있겠습니까. 마음으로만 초민하옵던 중에 오늘 또 저녁에 뵈오니 대감께옵서는 행좌가 모두 불안하시어 안절부절을 못 하십니다. 소녀는 이로 인해 장탄식을 했사옵고 뜻밖에 대감께서 보신 바 되오니 황공무지하옵니다. 저 같은 위인이라도 대감께서 혹여 쓰실 곳이 있다면 일만 번 죽는다 해도 사양치 아니하오니 부디 버리지 마시고 써 주시기 바라옵니다.”

초선은 말을 마치자 수건으로 명모에 넘치는 구슬 같은 눈물을 꼭꼭 눌렀다. 왕윤은 초선의 ‘혹여 쓰실 곳이 있다면 일만 번 죽는다 해도’ 하는 그 말에 별안간 어두운 밤에 번개 같은 광명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짚었던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했다.

“어허, 한(漢) 천하가 너의 손속에서 놀아 날 줄 누가 꿈에나 생각했겠느냐! 나를 따라서 화각(畵閣)으로 오너라.”

왕윤은 말을 마치자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화각으로 향했다. 초선은 그 뒤를 따랐다. 화각에서는 시녀들이 희희낙락 놀고 있었다. “너희들은 물러가라.”

모든 시녀들이 화각에서 물러가자 왕윤은 초선을 자리에 앉힌 후에 별안간 백발 흰 머리를 조아려 정중하게 절을 했다. 초선은 깜짝 소스라쳐 놀랐다.

“대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초선아, 너는 한(漢) 천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다오.” 왕윤은 말을 마치자 눈물이 샘솟듯 쏟아졌다. 왕윤의 쏟아지는 눈물을 보자 초선도 코끝이 찌르르 저렸다.

“아까도 아뢰었습니다마는 천한 계집이오나 소용이 되신다면 써 주십시오. 만 번 죽사와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초선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왕윤도 소매로 눈물을 씻고 말했다. “지금 백성들은 모두 다 거덜이 나서 생활은 거꾸러질 지경이요. 네가 아니면 이 나라를 구해 낼 수가 없구나.” 말을 마친 왕윤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서 다음을 말씀해 주십시오. 소녀도 결심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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